성경의 문화와 고고학적 고찰 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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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6 22:47 조회65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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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각기 3 가지로 분류되는 정치사적인 사건들과 관계되었다 :
첫째, 영토 분쟁과 동족 상잔의 남북 전쟁의 주역들이다.
예를 들면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베사, 아사 등이다.
둘째, 북왕국 주도하의 통합 시대에 있어서 오므리, 아합 그리고 예후 왕조이다.
셋째, 남북의 경제 공영시대에 있어서 여로보암 2세와 아사랴이다.
2.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주전 930-914년; 930-910년)
이 두 왕은 남북 분단의 책임자들이다. 르호보암은 북왕국의 여로보암이 뉘우치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반면에, 여로보암은 남왕국 르호보암이 분단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왕상 11:29 이하; 12:16).
그는 남왕국 르호보암이 야곱과 요셉 조상신앙으로 돌아와야 한다(신 33:13 이하)고 주장했다.
그리고 북왕국은 유다 지파에 속했던 베냐민 지파를 에브라임 북쪽 지파에 귀속시키기 위해 일생동안 전쟁을 되풀이 했다.
그러나 그런 남북 전쟁으로 인해 남북 왕국은 다윗 때에 얻어 놓았던 아람-시리아 영토를 상실했고, 암몬이 독립하여 떨어져 나가게 했으며, 에돔에게 독립을 허용했던 것이다. 이웃을 향했던 공격 전쟁이 수비 태세로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3. 베사(909-886)와 나답(910-909)
베사는 나답왕(이스라엘의 잇사갈 출신)이 블레셋인과 전투 도중에 있던 나답을 깁돈에서 살해하고 혁명을 일으켰다.
그 후 베사는 실로 성소의 아히야 선지자 후계였던 예후 벤 하나니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왕상 16:2). 베사는 적에 대한 이적 행위를 저질렀던 장본인이다.
4. 아사(주전 910-870)와 베사(북왕국, 주전 909-886)
이 기간은 북쪽의 다메섹이 북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능가했던 기간이었다.
그럼에도 북이스라엘 베사는 장기 집권을 하면서도 남 왕국 아사와의 베냐민 지파 영토 쟁탈전으로 국력을 소모시켰다.
그러자 북이스라엘 베사는 다메섹의 벤하닷왕과 동맹을 맺어 아사 왕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아사는 외교적인 행동으로 응수하여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전쟁 동맹을 단절케 하였다. 아사왕은 다메섹을 재물로 매수하였던 것이다.
동족 끼리 반목하면서 강대국을 위해 이적 행위를 자초한 결과였다. 이런 사례는 훗날 유다의 아하스(주전 736-716)가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때 앗수르를 개입시켜 이스라엘의 베가를 공격하여 패배케 하였던 역사와 비슷하다(사 7:1-9; 10-17장 참조).
5. 북 왕국 주도하의 통합시대
1) 오므리 왕조(주전 885-841)는 반세기 가깝게 지속되었다.
남 유다의 다윗 왕조에 버금가는 수완을 보인 오므리 왕은 군사 동맹과 결혼 정책을 통해서 남북의 화해를 준비하였다.
그가 신명기적인 역사가에 의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받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는 유다를 자기편으로 흡수하여 협력체제를 구축하였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아버지 오므리가 준비했던 남북의 평화 조약을 실천에 옮겼으며, 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친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전투에 종군케 하였고,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공주 아달랴를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군사 동맹과 결혼 정책을 통해 남북의 평화 통일을 이룩케 한 것이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주도권을 행사하였고, 유다가 양보함으로써 평화 통일이 이룩된 것이다.
2) 예후 왕조 :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 왕 요람(852-841)과 다윗 왕조의 아하샤(841)를 살해하고 왕으로 등극했던 예후는 근 백 년에 가까운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874-752). 주전 8세기 중엽 앗수르가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그의 왕조는 존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윗 왕가의 많은 왕자들을 무참하게 죽여가면서(왕하 11:1) 통일을 유지하려고 했다.
바알 종교를 퇴치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야훼 신앙의 예언자들 엘리사와 요나답 벤 레갑의 호응도 받았다.
그럼에도 예후는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을 자기편을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이런 예후의 정치와 밀착해서 하나님의 예언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새로이 생겼다. 그러나 예언자의 활동은 저차원적인 힘이요, 온전치 못한 덜 신학적인 성격을 띈다고 볼 수 있다.
6. 남북의 경제공영시대
예후 왕조의 말기까지만 해도 아직 강대국의 정치적인 위협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다메섹은 자기 뒷편 앗수르의 국력을 의식하고 약소 국가들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때였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여로보암 2세(782-753)는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시대(930-910년)에 상실했던 동부 요르단을 탈환했고, 암몬과 모압을 위압할 수 있었다(암 6:2).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예언자들(예: 호세아, 아모스)은 그 당시 향락 생활과 도덕적인 타락과 부패에 대해 질책을 가하였다. 예언자들 눈에는 국력 신장 과 경제 번영 이 남북통일을 위한 일종의 준비 단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더 화급했던 것은 경제 번영으로 인한 대부분의 타락과 부패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여로보암 못지않게 남유다 아사랴(웃시아, 주전 768-740)는 도시들을 축성하였으며, 두로와 시돈을 통해 중개 무역을 하였다.
군사 제도를 재정비하면서, 경제적인 번영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국가 번영과 경제적인 부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불공평과 부도덕한 사회에 대해서 준엄하게 질책하였다.
이상으로 우리는 남북의 왕들이 통일보다는 남북 영토 분쟁으로써 국력을 소모시켰던 일, 남북의 통일이 군사력과 경제력에 근거한 어느 한 나라의 주도권 아래서 가능했던 일 그리고 경제 번영은 빈부의 양극화 현상으로 인한 민족의 내적인 균열과 부도덕을 가져왔던 것을 고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은 바빌론과 앗수르의 포로가 되어 이국에 흩어져 살면서도 여전히 남북의 갈등과 분단을 자처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적인 화해와 통일 은 남북의 어느 왕권 통치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의 통치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전망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심판 다음에 올 약속에서 메시아적인 왕국을 기대하기에 이른다.
이스라엘 백성은 옛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왕이 되셨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포로 된 땅에서 하루바삐 고국으로 돌아가서 기쁘게 서로 웃으며 살날을 고대하였다. 변화된 생활로 다윗 왕조를 세울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주셨던 율법을 순종하리라고 다짐하였다. 하나님의 주권 통치와 새 계약 :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유하는 데는 3가지 절차가 있었다. :
첫째는 애굽의 정치적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Befreiung, Liberty)요, 둘째는 가나안에서 누릴 자유(Freiheit, Freedom)이다.
그런데 이런 영구적인 자유는 하나님의 율법/계약의 준수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 와 땅을 점유하고 생활하는 자유 사이에 꼭 있어야 할 자유하는 자의 율법 준수 의 과정은 하나님의 통치 구역으로서 해석되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하나님의 율법(토라)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 압류(押留)되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지닌다.
하나님이 기적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완전한 순종을 가능케 한다는 인간상의 윤곽이 정해졌다(렘 31:31-34; 32:37-41 참고). 고로 시내전승 단락과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모세에게 주어질 때 상황은 언제나 불 가운데서, 온 산이 진동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백성을 두렵게 하는 하나님의 현현 때문에 모세를 통한 율법 계시가 있었다(출 19:11-12, 17-25; 20:18-26, 특히 18-22; 24:1-3; 신 5:25-31 참고; 시 50:2-3 비교).
이런 율법 계시는 예언자들에게서 각기 다르게 표현된다. 예컨대 예레미야는 영'의 표현을 쓰지 않고, 계약'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반면에, 에스겔은 계약' 표현 없이 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1/ 하나님과 인간과의 정상화는 오로지 이런 계약과 영의 임재에서만 가능하다.
반 신성(反神性)과 부자유(不自由)에서 탈피하여 그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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