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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문화와 고고학적 고찰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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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6 22:20 조회5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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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리주의의 대두

1.서 언

 

15세기는 왕성한 지성의 발효 시대였다. 즉 신진세력인 합리주의는 결과적으로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약회시켰다. 바야흐로 인간 이성은 권위에 대하여 반격을 개시하였으며, 스스로의 자유를 크게 외쳤다.

 

2. 15 세기 합리주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두 인물이 대표적이다.

첫째로 로렌조 발라이다. 그는 교황청의 '콘스탄틴 대제의 기증'이라는 법적 근거를 함부로 조작하는 것에 도전하였다. 그는 문헌고증을 하였고, 불가타의 라틴어의 문체를 비판하였으며, 사도신경의 권위도 의심하였다.

둘째로 R.페코크이다. 그의 저작'기독교 신앙의 규율'은 이태리에서 일어난 발라의 저작보다 더 큰 화를 그에게 입혔다. 그는 이성의 강한 요구를 느꼈다. 성서 해석 자체도 인간 이성의 조명 아래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는 교회의 신앙은 완전한 합리성을 가진 것이라고 믿은 호교론자였다.

 

3. 16세기 합리주의

 

16세기에 들어와 고대 문학과 근대적 지성주의 영향은 더욱 현저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주지주의의 새로운 형이었다. 교부들을 연구함으로써 얻은 소득은 전통 안에 들어오지 못한 광범위한 기독교 사상이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반대가 일어났다.

신학만이 홀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었다. 토마스 모어같은 사람들이 대표자이다. 이 기독교 휴머니즘의 운동은 열광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 성서 해석자나 신학자에 대하여 반대하는 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멤버의 태도는 통일 되지 않았다.

에라스무스는 신약성서의 새역 본을 내놓을 때, 당시의 사람들을 비난하는 주서를 달았으며, 성서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콜렛은 성서의 자의적 해석을 강조하였다. 괄목할 만한 것은 저들의 저작에서 비로소 교회 밖에 있으며, 이성만을 유일한 안내자로 하는 해석자가 성서 해석을 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4. 17세기 합리주의

 

17세기는 과거보다 성서의 가치를 낮게 보았다. 합리주의의 세력을 더욱 성장시키면서 성서와 교회의 권위를 더욱 내리받이로 가게 한 두 철학자가 있다.

 

1) 토마스 홉스: 1651년 그의 연구 논문인 '리비아탄'을 출판했다. 여기에서 그는 대륙의 성서주의와 로마의 완고함을 거부하였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 자체가 아니라 그 계시에 관한 기록이라 라고 하는 현대적 이론을 말한다.

홉스는 정치 철학자이며 성서는 교회 정치의 규칙, 조례, 도덕적인 원리를 기록하고 있는 책이라고 보았다. 중세 말기에는 성서와 신학은 분리될 수가 있다고 보았다.

 

2) 스피노자 : 그는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의 문제를 풀이하면서 기독교도의 '적의와 증오'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함으로 이성은 진리와 지혜로 인간의 지성을 인도할 것이며, 또한 신학은 계속 경건과 순종을 가져오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스피노자는 성서를 집필할 유대민족에 속한다는 유리한 점이 있으며, 따라서 그는 성서의 기자가 기사를 쓰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연구 결과는 성서의 계시의 완전한 합리성이었다.

이러한 확신의 결과 인간 이성은 절대적인 자유를 얻었으며, 신학의 요구에서 놓여났다. 신학은 도덕적인 신학이 되었다.

이제는 성서가 우리에게 권위적으로 말하지 않으므로 역사적 해석 이외의 다른 이해는 필요치 않다.

신학과 철학의 분리는 지성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학을 포기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역사적 관심 때문에 우리는 성서를 연구하여야 하며, 역사적 해석의 일반적인 규율을 단지 응용할 뿐이다. 스피노자는 성서의 권위나 교회의 권위보다는 억측이 없이 활동하는 '공정한'이성의 힘을 더 신뢰하였다. 스피노자는 성서나 전통적 해석의 권위를 넘어서는 이성의 제 1의 성을 변호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합리주의는 18세기 초에 가장 보편화 하였다. 철학자들이 여러 세대 전에 주장한 논의를 통속적인 형식과 언어로 표현한 무수한 소책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18세기 중간에 접어들자 철학은 새 방향을 찾는다. 성서 해석에 대한 항쟁은 최소한 영국에서는 서서히 종료되었다. 성서에 대한 합리주의적 비평은 대서양을 건너가 토마스 페인에게서 끝나고 말았다.

 

 

 

 

 

 

 

 

 

. 19세기

 

1. 서 언

 

18세기 말까지에는 새로운 방법론을 취급한 성서 해석학의 개론서가 한창 유행할 정도로 성서의 합리적 연구가 발전하였다. 그러나 18세기말에 접어들면서, 성서의 역사적 분석이 큰 영향을 주기 시작했는데, 그 무대는 독일이었다.

 

2. 역사 비평의 발전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나, 이때 까지는 기독교의 반대자나 교회내의 소수파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행하여졌다.

그러자 독일 대학들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성서 연구는 교회의 통제를 벗어나 세속적인 학교의 측으로 옮아가 버렸다.

또한 독일 대학에는 새로운 낭만주의적인 자유의 관념이 있었다. 철학, 특히 헤겔 철학의 인도로 역사의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정한 객관적인 연구가 추구되었다. 19세기에 있어서 성서 해석과 신학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였다.

단 하나의 성서 해석으로서 인정받게 된 비평방법은 즉각 신학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재건하도록 방향을 지시하였으며, 또한 성서에서 찾은 신학의 자료를 재구성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비평적 역사적 방법은 방향을 지시하는 나침반이었으며, 불필요한 것을 잘라 버리는 낫이었다.

슐라이에르마허나 리츨은 둘 다 신약 성서의 비평이나 조직신학에 있어서 대가였다.

 

3. 역사비평의 이끈 인물들

19세기에 있어서 성서 해석의 가장 현저한 양상의 하나는 철학적인 가정이 암암리에 성서 해석을 인도했다는 것이다.

19세기 말에는 외적 관념과 일시적인 형식과의 사이를 헤겔 주의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성서와 다른 서적과의 차이가 무시되었다.

 

1) 쉴라이에르 마허: 합리주의와 종교개혁의 주관주의를 합류한 것이었다.

그는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였다. 예수의 부활은 혼수상태로부터 깨어난 것이며, 그의 승천은 제 2의 완전한 죽음이었다.

 

2) 파울러스: 천사, 이적적인 치유, 변화산의 기사 등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가졌다.

 

3) 바우르: 19세기 가장 중요한 신양성서 비평가이며, 헤겔의 강한 영향으로 교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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