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1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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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8 21:20 조회57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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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환상을 날조하고 있다.
이성과 교양으로 하늘나라를 통찰하려고 애쓰는 철학자들이 서로 불일치하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지혜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 예술과 학문이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그러한 사람은 자기 의견에 더 아름다운 색 채를 입혀 위장해 보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다.
따라서 칼빈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탐구하는 데 그렇게 많은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하여 한층 어리석고 눈이 멀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바울 사도의 말처럼 혼란의 원리에 매여 마침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예배하게 된다.(행 17:23)는 사실에 이른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특별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자연신학’(自然神學)만으로는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오류로 나아갈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3. 사람은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한 핑계할 수 없다.
1) 성령은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예배행위를 거절하신다. 칼빈은 순수한 종교를 부패케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견해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런데 빠질 수밖에 없고, 결국 유일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은 그들의 눈먼 마음속에 하나님 대신 마귀를 두는 자들을 모두 다 배교자라고 선언하신다(고전 10:20).
성경은 참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들어가실 여지를 만들기 위하여, 전에 이방인들 사이에 신으로 경배 받던 것을 어떠한 신도 어리석고 거짓된 신으로 정죄하는 한편,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계속 번창하던 시온 산외에는 어떠한 하나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합 2:18, 20). 그러므로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예배형식은 성령이 속된 것으로 거절한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한 도시의 관습이나 전통 그리고 그 여론에 따르는 것은, 경건의 띠로서는 너무도 약하고 부서지기 쉽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자기 자신을 증거 하시는 일뿐이다.
2) 그리고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顯現)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칼빈에 의하면 우주의 구조에서 조물주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렇게도 많은 등불이 우리를 비춰주고 있지만, 그것은 헛될 뿐이다. 비록 그 광선이 우리의 온 둘레를 비춰준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물론 다소의 섬광을 발하기는 하나, 그것은 충분한 빛을 방사하기도 전에 질식하여 버린다고 한다.
따라서 칼빈에 따르면 바울 사도의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보이지 않는 신성(神性)이 이와 같은 거울 안에서 나타나게 되지만, 하나님의 내적 계시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시적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 인간들이 더 이상 변명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사도 역시 하나님의 현현을 인간의 통찰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롬 1:19).
결론적으로 우리에게는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들은 우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어떤 가벼운 신지식을 맛보게 되자, 그 즉시 참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대신 머리로 만들어 낸 꿈과 환상을 치켜세우며 마땅히 참되신 근원에 돌려야 할 의, 지혜, 선, 권능에 대한 찬양을 그 밖의 어떤 무엇에 돌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매일 하시는 역사(役事)를 악하게 판단함으로써 그 역사를 희미하게 하거나 뒤집어엎거나 하여, 그 역사 자체로부터 영광을 빼앗으며, 창조주에게서 그가 받아야 할 찬양을 박탈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죄 성은 하나님이 존재를 ‘금수’(禽獸)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거나 하나님의 자리에 ‘반신적인 인간’이 대신하는 교만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의 영광을 박탈하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곳에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누구도 변명할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上) 제1장에서 5장까지는 “자연계시적 지식”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독립적인 실재로 우리를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허망한 환상을 갖게 되고 만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해야 할 인간들이 그를 창조한 창조주의 자리에 스스로 위치를 높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교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를 기초로 하여 이제 3장에서 5장까지는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상에 대하여 접근을 하고 있다.
특히 칼빈은 로마서 1장 18절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 즉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나나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 것은 우리 모두 아담 안에서 ‘진리’(眞理)를 ‘막았기’ 때문이라는 두 단어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19절에서부터 먼저 그 진리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롬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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