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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12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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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6:30 조회6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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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에 알맞도록 가르치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에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의 눈앞에 보여 주기 때문이다.

성례를 더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서 빠른 비유를 쓸 수도 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의 기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이 기초 위에 서 있지만 기둥으로 괴어야만 확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그 위에 서 있지만 성례를 첨가할 때에는 기둥으로 받친 것같이 더욱 튼튼하게 서 있게 된다.

또는 성례를 거울에 비교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거울 속에서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둔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성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말씀에 의한 것보다 더 명백하게 확인하시기 때문이다.

 

7) 성례에 역사하시는 성령

그러므로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는 일에 관해서는(이미 분명한 말로 설명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이 특수 임무를 성례에 돌리는 것을 독자들은 생각해 내기를 바란다.

성례에 어떤 비밀한 힘이 영구히 내재해서 그 자체만으로서 믿음을 증진하거나 강화한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께서 그것을 만드신 목적이 믿음을 확립하고 증진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저 내적 교사인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마음속에 침투하고 감정을 움직이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서 성례가 들어오게 할 수 없다. 성령이 없으면 먼눈에 비치는 태양의 빛이나 막힌 귀에 울리는 음성과 같이 성례는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성령과 성례를 구별해서, 역사하는 힘은 전자에 있고 후자에는 그 임무만을 남긴다.

이 임무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내용이 없고 빈약한 것이 되지만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며 힘을 나타내실 때에는 위대한 효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경건한 마음이 성례에 의해서 믿음으로 강화되는 까닭이 분명해진다.

눈은 햇빛에 의해 보게 되고 귀는 음성의 소리에 의해 듣게 되지만 눈에 빛이 비칠 수 있는 예리한 시력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눈은 빛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며, 귀가 듣기에 적당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면 결코 소리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빛을 보는 데 있어서 시력이 하는 일과 우리의 귀가 소리를 듣는 데 있어서 청력이 하는 일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는 일 즉 믿음을 잉태하고 유지하며 자라게 하고 또 확립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가정하자(이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럴 경우 두 가지 일이 결과로 나타난다. 즉 성령의 힘이 없으면 성례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며, 이 교사의 가르침을 이미 받은 마음속에서 성례가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는 것을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차이는 오직 하나뿐이다.

즉 우리의 눈과 귀는 날 때에 듣고 보는 능력을 받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분량 이상의 특별한 은혜로 같은 일을 하신다.

 

8)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는 말씀과 성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

우리 주께서는 이 성질이 외적인 그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비유로 가르치시면서 말씀을 "라고 부르셨다(13 : 3-23, 8 : 5-15). 황폐해지고 버려두었던 땅에 씨가 떨어지면 죽어 버리지만 잘 가꾼 땅에 심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완고한 사람들에게 떨어지면 모래 위에 떨어진 씨와 같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며 성령의 손이 잘 가꾼 영혼 위에 떨어지면 결실이 많을 것이다.

씨에서 곡식이 나서 자라며 결실하는 것같이 씨와 말씀에 같은 생각이 적용된다면, 말씀에서 믿음이 생기고 또 그것이 자라며 완성된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이 두 가지를 여러 구절에서 훌륭하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역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하시는가를(고전 2 : 4)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다시 생각하게 만들려고 자기는 성령의 일꾼으로서 일하노라고 자랑한다(고후 3 : 6).

마치 불가분의 유대로 성령의 능력이 그의 전도에 결합되어 사람의 마음을 내면적으로 조명하시고 감동시키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사역자를 농부에 비교하는데, 이는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가를 말씀하려고 함이다.

농부들은 땅을 애써 가꾼 다음에는 더 할 일이 없다고 한다(고전 3 : 6-9).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심은 씨가 하늘의 복으로 자라게 되지 않는다면 그 수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은 결론을 내린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 : 7). 이와 같이 사도들은 그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친히 임명하신 도구들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구별해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9)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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