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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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8 17:22 조회63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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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및 교리모음
(국제신학교)
남 보 석 박사(Th. D. Ph. D.)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혁신)
국제신학교(대학원)
Ⅰ. 칼빈의 기독교강요
*자연계시의 대하여
1. 칼빈의 생애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의 ‘느와용’(Noyon)에서 ‘제랄드 칼빈’(Gerald Calvin)과 ‘잔느르 프랑’(Jeanne le Franc)의 네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남달리 교육열이 강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최고의 교육을 받는 혜택을 입고 자랐다.
칼빈의 아버지는 칼빈이 12살이 되자 출세를 위해서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였고, 그 역시 같은 생각으로 14살 되던 해에 당시 최고의 지성의 도시인 파리 ‘라 마르슈’(la Marche) 대학에서 예비과정을 마치고, ‘몽떼규’(de Montaigu) 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하여 4년간 인문학 과정과 신학예비과정을 지독하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런데 칼빈이 ‘몽떼규’ 대학의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자, 그의 아버지는 성직자보다는 법률가가 되는 것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서 아들의 진로를 바꾸게 하였고, 결국 칼빈은 파리를 떠나 ‘오를레앙’(Orleans) 대학으로 가 법률을 전공하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비밀리에 헬라어를 공부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의 일대 전환이 오게 되었다.
당시 로마가톨릭에서는 일체 헬라어를 공부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시키고 있었다.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에서 1531년 22살에 법학석사 학위를 받고 그 다음해에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이라는 탁월한 논문을 발표하여 그의 자질과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으며, 1533년에는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런데 헬라어로 된 성경을 읽게 되면서, 그동안 로마가톨릭에서 가르쳐 왔던, 또는 설교 해 왔던 내용들이 옳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533년 10월 31일 자신과 교제하고 있던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파리 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제목의 취임 연설문을 발표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은 사실상 당시의 소르본느 대학과 그 신학자들을 비판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조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 칼빈의 영향 하에 작성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니콜라스 콥과 칼빈은 사실상 파리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인 1534년 10월 18일 소위 ‘벽보사건’이라고 부르는 프로테스탄트들의 공개적인 저항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유일하신 중보자시오.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성찬을 직접 반대하여 만들어진 교황주의 미사의 그 무섭고 용납할 수 없는 남용에 대하여…‘로 시작되는 벽보들을 파리와 프랑스의 주요도시에 게재하고 신앙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프랑스의 국왕인 프란시스 1세는 교황 바울 3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신의 영토 내에 모든 이단을 섬멸하겠다고 칙령을 발표함은 물론,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을 체포하고 그 중 35명을 화형에 처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특히 35명의 화형처분자 중에는 칼빈의 친구 안티엔느(Etienne de la Forge)는 물론 자신의 친 형제도 1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를 회심케 함은 물론 나아가 경건한 삶에 눈을 뜨게 하였고, ‘경건’을 그의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25살에 받은 성직의 특권을 포기하고 정치적 변혁기에 있는 프랑스를 떠나 스트라스부르크를 거쳐 스위스 바젤로 도피하였으며, 그의 나이 27세 때 이곳에서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를 써서 종교개혁자로서 길이 빛날 대 과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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