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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10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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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6:15 조회5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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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감정에 편견을 갖게 하고 혐오의 감정을 갖게 하는 사실은 쉽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잘 칼빈주의 자가 주장하는바 견해를 굽혀서 표현한다고 말을 다해서 반대의 주장을 한 후에 정죄를 한다든지 버림을 받는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선택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논증하는 것이다.

이 교리에 관해서 먼저 알아두어야 될 것은 우리들이 이 교리에 관련된 모든 비의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책임은 이 교리에 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말한다는 것뿐이다. 이상과 같은 어리석은 말장이에 대해서 바울이 던져준 충분한 오직 한 마디는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의 지혜안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인 것이다.

절대 주권에 관련을 지으셨다. 그는 거기 일체의 근거를 두셨다.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알미니안주의 자는 여기서도 참 난문을 피하지 못하고 문제를 혜결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모든 일에 관해서 예지를 가지시는 것을 인정하는 그들은 왜 하나님이 죄 있는 생애를 보내고 복음을 거역하며, 회개하지 않고, 죽고 영원의 멸망에 괴로움을 당한다고 예지하시는 자를 창조 하셨는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정죄되고 버림받는 자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정죄되고 버림받는 오직 하나의 틀림없는 증거인 결정적인 불순종은 죽을 때까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회개하지 않는 사람도 회심의 변화가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회개를 유도하지 않고 또 그를 구원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만일 누구나가 자기중심에 양심의 고통을 느끼는 자가 있으면 그야말로 하나님이 끌어당기기 위해서 쓰시는 수단일거라 생각이 된다.

복음은 팔레스틴이 얼마 안 되는 읍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단순히 지방적인 사건이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한 외침이다.

변함없이 풍부한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의 강의 끝까지 이르리라" 및 이스라엘은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너 라고 하는 것 같이, 그 사명을 위해서 선택된 것이다. 에스겔에게 보여주는 환상에는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 처음에는 발목을 적시지만, 다음에는 무릎 허리에 이르러 큰 강이 되어, 건너기가 어려울 만큼 되었다.(47:1~5). 또 다니엘의 환상에 있어서 짐승은 성도들과 싸우고 한 때는 도를 지게 했지만, 그러나 "그 때가 와서 성도들은 나라를 얻었다는 것이었다.(7:22)

 

c. 제한적 속죄

Three. Limited Atonement

 

지금 여기서 제한적 속죄하는 토픽아래 논의 하려는 문제는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서 차별도 예외도 없이 모든 개인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으로 바친 것인가?

혹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택된 자에게만 특별한 관계를 갖는 것인지, 바꾸어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것인가?

혹은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는 것인가 어느 쪽인가? 이다. 이 교리가 선택의 교리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임을 곧 분간이 가능할 것이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속죄의 가치 혹은 능력의 한도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이 점을 오해하고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제한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는 보다 많은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속죄의 가치는 전 인류를 구원하는데 충분하지만, 선택된 자만을 유효하게 구원하시는 것이다.

알미니안 주의의 교리에 의하면, 속죄는 단지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해서 그들 자신을 구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데 불과하다 -- 만일 그들이 원하다면--이란 속죄는 그 본질상 범위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단순히 구원을 가능케 한다는 정도의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속죄가 유효 적으로 구원을 보증한다면 그것은 선택된 자만이 관계를 갖는 다고 감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월필드 박사가 말한 것 같이 "우리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비싼 가치를 갖는 속죄인가, 넓은 범위에 속죄인가, 이 두개는 양립되지 않는다," 라고 그리스도의 사업은 이것을 보편화한다면 그 실질은 물을 탄 것이 되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이것을 양적으로 제한하지만 질적으로는 불변이다.

칼빈주의 자에게 있어서 속죄는 좁은 다리이지만 이것은 완전히 건널 수 있는 다리이다.

알미니안주의 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강의 중간까지 밖에 갈 수가 없는 크고 넓은 다리이다.

사실 알미니안주의는 칼빈주의보다도 훨씬 신랄한 제한을 그리스도에 사업에 가하고 있다.

만일 속죄의 은혜가 보편적이고 무제한 일 것 같으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요구한 것 같은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더욱 낮은 구원을 보여 주셨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에 물을 타서 지극히 쉬운 길이 제공되게 한다. 말하자면 지불능력을 없는 죄인에게 한 달에 15센트를 탕감해주는 것 같은 안이한 은혜가 되는 것이다.

한편 칼빈주의의 자는 최초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완전복종의 율법은 영원의 율법이며 그 율법의 요구는 너무나 엄격하고 혹은 그 형벌이 가혹하다는 인상을 제거해 주는 것 같은 일은 전연 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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