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7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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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5:37 조회6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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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늘의 심판자 대신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성령)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힘써 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하나님의 은혜, 곧 선물 중 칼빈은 둘째의 중생(또는 성화)부분을 먼저 설명한 후 이제 칭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통상 일반적인 논의순서로 본다면 칭의가 먼저 언급되고 그 후에 중생과 그리스도인의 삶(선행)을 언급하는 것이 옳겠지만, 칼빈은 “믿음은 결코 선행을 결하지 않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성도들의 선행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순서를 바꾸어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다만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칭의와 관련하여 선행의 문제, 즉 구원을 위한 우리의 선행이 요건이라고 보는 가톨릭의 논의에 대한 반박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우선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구원을 세울 토대는 물론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수립할 기초도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토의를 진행함에 있어 “종교 생활의 요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더 많은 주의를 기우릴 것이라 한다.
2) 칭의의 개념
칭의와 관련하여 우선 의롭다함을 표현함에 있어,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과 믿음에 의해서 또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표현이 있음을 생각하자.
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벌이 있지만, 하나님의 판단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은 사람에게는 모든 죄인이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만은 심판대 앞에서 굳게 설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칭의를 간단히 설명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 하였으며, 또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轉嫁)하는 것이라 말하였다.
3) 성경에 있는 용법
누가복음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했으며(눈 7:29), 그리스도께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의롭다함을) 얻느니라”라고 하셨다(눅 7:35).
또한 바울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방인들을 의롭다 하실 것을 미리 알았다고 말할 때(갈 3:8),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에 의해서 의를 전가(轉嫁)하신다는 뜻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지 않은가? 또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불경건한 자를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다고 말할 때(롬 3:26), 그것은 불경건하여 당연히 정죄를 받을 사람들이 믿음의 덕택으로 그 정죄에서 풀려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욱 명백한 것은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라는 말씀으로, 이것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사면해주신 사람들을 누가 정죄하겠는가”라는 뜻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재로 의롭다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이 사면은 우리 자신의 무죄가 확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우리에게 전가(轉嫁/ imputation)하셨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된(看做 보게 된/ deem or reckon)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의롭다함은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 것이다.
4) 칭의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용납이며 죄의 용서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그의 은혜 가운데 기꺼이 받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기로 하셨고(고후 5:18-20),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칭의는 “용납”, “용서”, “죄의 전가” 및 “화해됨”이라는 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됨”을 말함으로써(고후 5:18-19), “화해됨”은 곧 “의로 인정됨”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며, 그 이전에 용납과 용서가 전제되는 것이다.
2. 오시안더(Osiander)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을 논박함
1)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사상
칼빈은, 오시안더가 “본질적 의”라는 이상한 괴물을 도입해서, 거저 주시는 의를 폐지하는 것은 아니나 이의를 깊은 안개 속에 묻어버렸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뚜렷이 체험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논박한다. 오시안더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말 한 것은 동의할 수 있지만, 여기서 나아가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본질이 혼합된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적 죽음에 의해서 받는 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결합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2) 오시안더는 죄의 용서와 중생을 혼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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