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의 5대교리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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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1-02 22:00 조회7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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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하는 바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선택은 하나님의 힘에 의한 감화이며 자비로운 선택의 행위에 주어지는 것이다.
헤이 와트 박사는 과거의 연주된 가장 아름다운 음악에 의해서 혹은 치축을 뒤흔든 다고 생각할 만큼 큰 우뢰에 의해서 무덤 속에 시체가 소생할 것인가? 죄와 허물에 의해서 죽은 죄인이 율법이란 우뢰에 의해서 일으킴을 받을 것인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에 있는 것과 한가지인 것이다. 라고 말한다.
Calvinism and Arminianism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비교 연구
서론
칼빈주의(Calvinism)와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는 신학적 성경적 관점에서 각기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다. 이미 17세기의 돌트회의(The Synod of Dort)를 기점으로 신학 논쟁을 빚어 온 두 신학간의 불협화음은 오늘날까지도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계속해서 두개의 커다란 신학적 기둥으로 여러 교단과 신학교의 신학 체계를 다져 가고 있다.
1. 돌트회의(The Synod of Dort)
1618 년 11월 3일 화란의 돌트(Dordrecht)에서는 화란개혁주의교회를 주축으로 국가적 종교 모임인 돌트회의(Synod of Dort)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의 주요 관건은 다음의 3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Erastianism건으로 정부가 교회를 통제하는 문제에 관한 내용이고, 둘째는 Erasmus와 Coornheert를 축으로 성경적 고백 보다 헬라주의적 경향으로 치우치는 반고백적 인본주의(Anti-confessional Humanism)에 대한 문제수습이며, 세 번째는 알미니안들이 채택한 “1610년 항의서”(The Remonstrance of 1610)에 대한 문제였다. 본 논고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신학적 차이를 살펴보는데 그 의의가 있으므로 세 번째 문제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하고자 한다.
2. Jacobus Arminius와 The Remonstrance
돌트회의는 그 발생 원인이 회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Jacobus Arminius(1560-1609)라는 사람에게 있다. 알미니우스는 데오도올 베자(Theodore Beza)의 제자로서 화란개혁주의 목사였으며 꽤 규모가 큰 화란 성직자 양성장이라 할 수 있는 라이덴 대학(University of Leyden)의 신학 교수였다. 암스테르담의 젊은 학자요 목사였던 그는 어느 날 Dirk Koornhert라는 평신도 신학자의 견해를 논박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그 이유는 1567년경 Koornhert가 칼빈주의자들이 철저하게 믿어 왔던 예정론 교리를 반박하고 Belgic Confession(웨스트민스터고백과 흡사한 화란의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대해 회의를 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주의 예정론을 방어하고자 Koornhert의 신학을 연구하던 알미니우스는 오히려 그의 신학에 매료되어 많은 부분에서 Koornhert와 공감하고 그의 신학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알미니우스가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대해 본격적으로 신학적 반감을 갖게 된 시기는 일찌기 Beza가 발전시켰던 예정론 사상(supralapsum, 아담이 타락하기 전 하나님이 이미 “선택”과 “버림”을 선포하셨다는 교리)을 라이덴 대학의 동료 교수 호마르(Franciscus Gomarus)가 옹호하고 나면서 부터였다.1) 그는 자신의 저서
Declaration of Sentiments(1608)에서supralapsarianism과
infralapsarianism의 두 가지 예정론에 관한 이론을 반대하는 20가지 이유를 적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위의 두 가지 이론이 복음에 대해 전혀 무익한 견해로 보았다. 그는 이것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선과 공의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등과 모순되는 이론이라고 비난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런 형태의 예정론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불명예스러운 일”이며, “인간의 구원에 상처를 입히는 행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순서를 뒤 바꾸어 놓는 일”(예를들면, 신앙인들의 의는 믿음을 소유함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지 결코 믿음이 있기도 전에 생겨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2)
무엇보다도 그는 “무조건적인? 예정론이야 말로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드는 일이라고 거부했다. 이런 주장을 통해 알미니우스는 교회의 모든 교리가(예정론을 포함하여) 기독론 중심이 되어야 하며 신자들에게 덕을 끼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는 supra-와 infralapsarianism의 예정론를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 두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첫째는, supra-와 infralapsarian 예정론이 결코 구원 받을 자들의 머리가 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선포(Gods decree)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산 돌(living stone)로 비유된 우리가 믿음을 통해 친히 머릿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3)
이와 같은 알미니우스의 신학적 견해에 대해 Gomarus와 그의 제자들은 전통 칼빈주의의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맞대응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화란의 국교회는 두 개의 큰 분파가 생기고 양쪽 진영 간의 대립은 신학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08년 알미니우스는 화란 정부에 정식으로 종교회의를 청원하여 자신의 신학적 입지를 공포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인 1609년에 그는 국회에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피력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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