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문화와 고고학적 고찰 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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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6 22:45 조회60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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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한계를 잘 지켜서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극소수요, 오히려 자신의 허망에 부풀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된 종교의 빛을 받기 위하여는, 마땅히 하늘의 교리에서 그 시초를 찾아야 하며, 그리고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는 아무도 참되고 건전한 교리를 극히 일부분이라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에 대하여 증거 하고자 하신 것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참된 이해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모든 면에서 원만한 신앙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올바른 지식은 다 순종에서 나온다.
확실히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걸쳐서, 자신의 탁월한 섭리에 의해 인간을 특별히 고려하셨던 것이다.
14) Gerhard von Rad, Genesis, Old Testament Library, trans. John H. Marks, revised by John Bowden (London: SCM, 1972), p. 96. 이와 비슷한 입장을 나타내는 해석으로 Walter Brueggemann, Genesis, Interpretation (Atlanta: John Knox Press, 1982), p. 50도 보라: "The cursed ones are protected. The one who tests is the one who finally provides (3:21; cf. 22:1-14). With the sentence given, God does (3:21) for the couple what they cannot do for themselves (3:7)."
Ⅺ. 구약의 나타난 상생 신학
1. 역사는 정치영역에서 일어난다.
역사는 일찍부터 정치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런 역사의 틀 속에서 「민족의식과 통일」은 이른바 정치적'이란 형용사 없이는 불러질 수 없으며, 따라서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정치의 왕도(王道)는 고대 중동의 정치 형태와 평행되면서도, 이스라엘의 야훼의 신앙은 그런 보편적인 정치를 독특하게 발전시켜서, 인류에게 모형 화 또는 전형화(典型化)를 시켰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왕국 이전부터 있던 민족과 하나님 통치의 사상과 왕국 이후에 첨가된 정치적인 동기들을 고찰하도록 하겠다.
왕국이전의 민족과 하나님 통치에 관하여 : 이스라엘의 최초 역사는 애굽에서의 탈출(출1-15)에서 시작하여 광야방랑(출 16-18; 민 10-34),
그리고 그 사이에 시내산 율법계시 사건(출 19-민 10:10)이 끼어진 도식에서, 억압으로부터 구출/자유,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시내 계시/계약이 서술되고 있다. 여기에 최초의 하나님의 자유 의지의 선택과 인간을 자유케하는 하나님의 주권 통치가 실현되었다.
출애굽 해방과 자유 그리고 계약 체결 이전에 땅과 후손의 약속을 받았던 족장들의 역사(창 12-50)는 하나님의 항구적인 미래의 약속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출애굽과 창세기 족장 역사는 내용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에 제한되었지만, 태고 설화(창 1-11)에는 인류사와 하나님 백성의 상생(相生 또는 共生)의 이야기가 설화적인 형태로 묘사되었고, 신학적인 해석을 붙이고 있다.
민족 기원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창 10장의 노아의 세 아들들 셈, 함 그리고 야벳 세대에서는 나타나지 않다가, 창 11:10에서 셈 부류의 지체인 데라에게서 나타난다 : 아브라함, 나홀, 하란이 데라의 아들들로 계 보화 되었으며, 북부 셈족에 속한 이들이다. 아브라함은 셈족의 대표자로서 지역적으로 광대한 지역과 관계를 맺는다. : 예컨대 상부 메소포타미아, 북부 시리아, 아라비아 반도, 팔레스틴 남동부, 요르단 동부와 서부 등이다.
이런 셈족 계열 옆에 비셈족 계열이 나중에 도 추가된다. 이스라엘이 영토, 왕, 성문법을 갖지 않았던 상태에서, 그들은 유목민적 장막 촌에서 살았고, 공동 연대의식 가운데, 강권적인 명령이나 억압적인 지배보다는 권유와 설득을 통해서 연장자의 말을 따랐다. 이런 씨족 대표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예배 제단을 설립하여,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이런 3 기능을 한 인격 안에 통합하였다.
이런 신앙 형태는 출애굽 사건 후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과 율법을 순종하는 야웨 신앙으로 확대/발전하였다. 족장신앙과 야훼신앙 형태는 이스라엘을 점차 민족 공동체로 성장시켰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족장에게 약속하신 땅과 후손 이 출애굽 사건 후 가나안 영토와 이스라엘 민족으로 구체화되면서 하나님의 주권 통치의 사상과 고대 중동 왕권의 통치 사이의 긴장이 생겼으며, 결국 사울 다윗 솔로몬 통치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의 주권 통치는 세속왕권 통치로 이양되었다.
이런 왕도 통치는 솔로몬 사후 남북 분단을 고착화시켰으며, 남과 북의 민족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특히 주전 8세기 중엽 예언자들은 앗수르의 정치적인 위협 아래서 옛 시온-다윗 시대의 전통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고, 왕도 통치권의 한계 상황을 의식하였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고대 출애굽/광야 생활과 시내 율법을 통하여 남북 민족의 변화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 통치를 설교하였다.
왕국 이후의 정치 상황 : 비교적 다른 강대국들이나 이웃나라보다 뒤늦게 국가 형태를 이루었던 이스라엘은 다윗 제국을 기점으로 일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주전 1010-970년).
인간 왕도의 성립은 주변 국가들의 항구적인 위협과 침공 아래서 필요 불가결했다.
그러나 이런 다윗 국가는 민족적으로 남부 지파와 북부 지파의 두 요소들이 분리되었으며, 지역적으로는 각 지파들의 독립적인 생존 영토들이 분할되었기 때문에, 다윗 국가는 처음부터 민족-영토적인 분리의 요소들로써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다윗은 북부 지파 사울 왕과의 대립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건부 계약 통치를 이스라엘 장로들로부터 위임받았을 뿐이다. 이런 위임은 다윗 왕 당대에만 가능할 뿐, 그의 후계자에게는 세습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다윗이 남북 통치를 합법화시켰던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북 왕국의 법궤를 옮겨온 사실이다.
이제부터 정치적 의미를 가진 시온-다위 전통은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중 시내에서 받았던 율법궤를 받아들임으로써 종교적인 의미도 갖게 되었다(예를 들면 시; 68:18b<17절> : 주께서 시내에서부터 성소<예루살렘/시온> 안으로 진입하신다. ).
이런 두 전통들 시온 전통과 시내율법전통은 다윗 통치 이후 항상 한 쌍을 이루는 유기체가 되었지만, 신학적으로는 정치적인 메시아 왕국의 도래보다는 하나님의 현현으로서 율법 수행이 우세하게 성찰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북 민족이 하나가 되는 길은 시온 전통에서보다는 시내 전통의 율법 순종에 따르는 생활의 변화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남북 왕들은 시내 전통 보다는 각각 예루살렘 전통과 사마리아 전통에 서서 정치적인 통일을 추구하는 길로 들어섰으며, 하나님 주권 통치 영역에서 벗어났다. 여기서 필자는 앗수르 대국이 주전 750년 신흥 세력으로 등장하기까지 930-750년 기간의 남북의 분단과 그들의 정치적인 투쟁들을 다루겠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주전 930-750년의 근 180년 동안은 고대 중동국가들이 시리아와 팔레스틴에 정치적인 영향을 행사하지 못했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이런 평화로운 시대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경쟁 의식에 사로잡혀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전쟁을 빈번하게 일으켰다.
분단 민족들의 전쟁 : 이미 위에서 제시했던 바와 같이, 930-750년에 있던 남북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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