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4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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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9 17:26 조회65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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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이 제한 선택을 인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비판을 가한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하나님의 자비는 복음을 통하여 이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모두 제시되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과 불경건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믿음, 즉 하나님의 조명(the illumination of God)이다.
그 결과 경건한 사람은 복음의 역사를 느끼고 불경건한 사람은 복음에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 조명 자체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척도가 된다고 본다.
그리고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무차별적이라는 비판에 대하여,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심에 따라 유대인 중에서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 부르시며(롬 9:24),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신다고 반박한다.
칼빈의 선택과 예정론에 대하여 비판자들은, “선택 교리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든다”, “선택 교리는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하며, 결국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할 것도 예정하셨다”, “선택 교리는 하나님이 편파적이다”, “선택 교리는 고결하게 살려는 열의를 전적으로 말살한다”, “선택 교리는 모든 충고를 무익하게 만든다”는 등의 비판에 대하여, 공의의 하나님은 결코 불의를 조장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누구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아니고서는 멸망과 심판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발로라고 본다.
즉, 인간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온갖 정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도무지 의에 길로는 갈 수 있는 실력을 상실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선택과 예정을 통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실현되게 되는 것이라 본다.
따라서 선택과 예정론은 인간의 교만으로 하나님을 대항할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겸손으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떠는 동시에 그의 자비하심에 감사하며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생활을 하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자기의 기쁘신 뜻이 드러나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택하시고 에서는 버리신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왜 그리하십니까”라고 달리 하나님을 향하여 힐문할 수 없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칼빈의 선택과 예정론은 한편은 선택의 대상이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반면, 다른 한편은 멸망의 길로 유기하시는 이중예정론이다. 이러한 선택과 예정론에 대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보편성과 구원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무리들은 성경 에스겔서 33:11, 디모데전서 2:3-4, 로마서 11:3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악에서 돌이키는 자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위의 에스겔서의 말씀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며, 뒤의 말씀은 외면적인 부르심은 그것을 듣고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들의 모든 핑계를 빼앗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하나님과 화해케 하는 은혜의 증거임을 드러낸 것으로 봅니다.
특히 로마서는 출애굽기 33:9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느니라”라고 풀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약속의 보편성과 달리 구원의 보편성은 성경이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칼빈이 하나님의 약속의 보편성은 분명히 인정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다 구속의 은혜를 누리는 보편적인 구원은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의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예정론의 또 하나의 귀결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칼빈은 이중예정론을 그의 비판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론이라는 것이다(작정-선택과 예정-부르심-칭의-성화-견인).
이미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칼빈의 선택과 예정론은 지금도 반대론자가 많이 있지만, 그의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왜 칼빈은 선택과 예정론은 신론이 아닌 구원론에서 언급한 것일까요? 아마 여러분들은 이제 조금 눈치를 챘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를 좀 더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 루터파 학자들 중에는 칼빈은 이성주의자 또는 교리중심자라 평가하기도 하지만, 최근에 들어 칼빈은 오히려 관계적 신학자 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신학자, 또는 존재론적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신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이러한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칼빈의 예정론이 성경 해석적이며 목회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택과 예정론은 물론 조직신학의 한 이론적 분야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칼빈의 입장에서 보면 선택과 예정론은 성도들에게 바르게 목회하여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생활을 하도록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선택과 예정론을 좀 더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기독교강요 제3부 제21장 내지 24장 이외에도, 그의 로마서 주석 중 특히 로마서 제9장을, 그리고 구체적으로 목회학적인 면에서는 그의 에베소서에 대한 설교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에베소서를 참고하자는 것은, 그가 에베소서 설교 중에 “우리의 신앙이 이 길인지 저 길인지 흔들려서는 안 되며, 복음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진리에 불변의 확실하고 탄탄한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것과, 비록 우리는 “이 세계의 많은 비참한 모습에 좌지우지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에게로 부르셨으며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믿을 선한 이유가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머리 되신 하나님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시는 한 우리의 아버지 되신다는 복음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그의 교훈 속에서 선택과 예정론은 논의를 위한 논의가 아니라 확신에 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로서의 경건한 삶의 실천을 지도하려는 것임을 가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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