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12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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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6:33 조회58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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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칭의론
1)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자연 상태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구속될 필요가 있다. 1-6)
2) 칭의와 관련하여 인간은 네 종류로 나누인다.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일생 동안 어떤 종류의 의를 가질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 의를 네 가지로 구별하려 한다. 사람은
⑴ 하나님을 전연 모르고 우상 숭배에 파묻혀 있거나,
⑵ 성례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나, 불결한 생활을 계속하여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거나,
⑶ 그 사악한 마음을 헛된 의식으로 감추는 위선자이거나,
⑷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인다.
첫째 경우에 있어서 사람을 그 천품에 따라 판단한다면, 머리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선한 것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성경의 증거를 거짓말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면, 아담의 모든 자손에 대해서 성경이 판단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은 마음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는 것이다(렘 17 : 9). 또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온통 악하며(창 8 : 21), 사람의 생각이 허무하며(시 94 : 11),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며(시 36 : 1, 롬 3 : 18),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시 14 : 2). 요컨대 그들은 육이다(창 6 : 3). 이 말의 뜻은 바울이 열거한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즉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그밖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추하고 가증한 것이다(갈 5 : 19-21). 이런 것을 사람들은 자랑하며 의지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거룩하다고 인정되는 덕행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찬란한 겉모습을 전연 무시하기 때문에 의를 위하여 사람의 행위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려면, 우리는 행위의 근원을 깊이 탐구해야 한다. 여기에 논의할 광범위한 분야가 있으나 이 문제를 간결하게 처리할 수도 있으므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나의 주장을 서술하겠다.
3)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행위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자연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비교하면 그 증명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은혜를 베풀만한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을 전연 찾으실 수 없지만 우선 너그러 우심으로 값없이 사람에게 오신다고, 성경은 도처에서 가르친다. 죽은 사람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비추실 때에 그는 우리를 소생시키시며(요 5 : 25),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고 한다(고후 5 : 17).
특히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 우심을 자주 이러한 비유로 찬양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위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한다(엡 2 : 4-5). 다른 곳에서는 아브라함을 모범으로 삼아 일반 신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데 대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한다(롬 4 : 17). 우리가 없는 자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교만을 엄격하게 억제하여 말씀하신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 : 11). 바울은 이 말씀을 설명하는 의미에서(롬 11 : 35),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순전히 부끄러운 빈곤과 허무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차지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행위에 의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엡 2 : 8-9 참조) 증명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 : 10).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선 중생함으로 해서 오는 것이며, 누가 자기의 의로 하나님을 감동시켰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천성대로 한다면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수치스러운 상태에 있는 인간이 아직도 자기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 듯이 감히 생각한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위대한 도구와 함께 주께서 "우리를‥‥‥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임을(딤후 1 : 9) 인정해야 한다.
또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쫓아,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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