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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문화와 고고학적 고찰 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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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7 12:22 조회5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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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스데반의 설교와 바울의 설교의 연결의 의미

 

이제 대개 세 가지 원칙은 나왔고 한 가지 덧붙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 곧 특별한 구원 역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시는 의미와 관련해서 본문 가운데서 취급해야 할 것은 스데반의 변명 내용과 사도 바울의 설교 내용을 비교해 보면 어떤 특색이 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시초 곧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해서 모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배역의 역사와 심판의 역사는 나중에 간략하게 언급을 했지만, 전체적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 나름대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바울의 설교 내용을 보면 가나안 입성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엇에 국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바로 다윗왕권 성립에 국한하고 있다는 느낌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거기에 대해 우리가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울 사도는 그의 관심의 폭을 좁혀서 이스라엘 전체 역사의 의미를 생각하기 보다는 역사의 한 부분(한 지류)인 다윗왕권의 역사를 그 나름대로의 필요에 의해서 집어내어서 한 부분만을 취급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 부분과 대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의 부분적 의미를 서로 연결시키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견해에 대해 본인의 견해는 다르다.

스데반의 설교와 바울의 설교가 주로 강조해서 다루는 부분을 보면 서로 연결되게 되어 있다. , 모세시대(광야시대)까지 되어 있고 그 이후의 부분은, 스데반의 설교는 아주 간략하게 압축되어 버린다.

대신 바울의 설교에서는 그 부분까지는 한, 두 줄로 압축되어 버리고, 그 다음 역사적 단계인 가나안 입성, 정복부터는 아주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스데반의 설교와 바울의 설교를 자세히 연결시켜 보면 역사의 지류를 다루고 있기 보다는 하나의 동일한 시각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역사를 보는 시각이 처음에는 전체적인 것으로 시작하다가 하나의 지류로 빠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구약에서 본다면 다윗왕권 성립에로 모아지는 것이다.

다윗왕권 자체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의 예표로서의 의미다.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가 결국 다윗 왕권성립이라고 하는 쪽으로 초점이 모아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구약에 있어서의 다윗왕권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이 본문 한 가지를 보고 추측하는 억측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염려가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억측이라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이것을 확인해 주는 성경이 있는데 바로 역대기다.

역대기를 보면 족보가 나오는데 그 첫 시작이 창세기부터 시작되는데 다윗에게서 완결되어 있다. 구조 자체로 보면 역대기 저자가 바라보는 역사적 시각은 창조로부터의 모든 세계의 역사가 다윗왕권에로 모아진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구약의 계시 틀 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곧 그의 왕으로서의 사역의 인류역사를 향해 갖는 의미를 그 나름대로 증거 한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역사의 중심이고 초점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한 신학자가 만들어낸 구호가 아니고 성경 자체가 분명히 그 쪽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9. 칭의의 관점에서 신구약의 차이 비교

 

13:38절 이하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가 영원한 왕으로 세우심 받으셨음을 말씀한 다음 이를 통하여 죄 사함이 선포되고 모세의 율법으로서는 의로워 질 수 없었던 그 모든 것으로부터 의로워지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는 신구약의 차이를(죄 사함과 칭의라는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인데) 칭의의 관점에서 비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모자 잎 시스템 즉 모세의 율법으로는 결코 의로워 질 수 없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가능해졌다, 라는 뜻이 된다. , 모자 잎 시스템의 불완전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상징적 의식과 예표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오직 율법의 요구만이 역사적 실체로 주어졌고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은혜는 상징적 의식과 예표로서만 주어졌던) 모자 잎 시스템 그 자체만으로는(외부적 상징과 예표자체 만으로는) 죄 사함의 은혜, 효력과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증언하고 있다.

이것의 구체적 의미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서 많이 취급하고 있다. 이런 것은 대개 어떤 말들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을까?

구약의 여러 은혜의 수단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그것은 '육체의 법만이 되어서'라는 히브리서 말씀이 있다.

황소의 피가 진정한 죄 사함의 효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등등 대개 이러한 것들과 연결시켜 이 말씀을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것을 언급한 것은 신구약의 관계가 구체적인 Topic과 결합될 때 그 논의가 매우 복잡하고 깊어질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 칭의의 문제에 있어서 신구약의 관계의 미묘함을 깊이 다룬 책들이 굉장히 많다.

신약의 거의 모든 성경이 다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갈라디아서라고 할 수 있겠다.

 

16) Cf. Gaffin, "Introduction," p. xix: "... the redemptive-historical context or epoch defined one the one side by the resurrection of Christ and by his return on the other."

10. 분별하는 영적 실체

 

자신의 겉 사람이 판단하는 선악의 분별이 아니라 속사람의 직관적인 능력에 따라 역사하는 진리의 영으로 분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이나 생각으로 하는 판단은 성경지식에 가두어버리게 되고 영적 통로를 막아 버리고 신령을 지각하지 못하게 되거나 반대로 영이 열리기는 하였지만 진리가 없기 때문에 신비스러운 잠재 능력이 외부로 나타나는 것을 성령으로 생각하여 자신의 속사람이 변화된 상태에서 나오는 진리가 아닌 거짓의 여이나 세상적인 속성이나 구습에서 역사하던 영에게 속고 있을 뿐이다.

물론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100% 전부가 거짓의 영이라는 말이 아니다 때때로 레마도 나오고 신령한 지식도 역사하지만 온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 속성이 강한 쪽으로 끌려가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미련함을 반복한다.

성경이 열리지 않은 심령은 영적 훈련이나 연단을 받고도 영적 지각이나 분별이 없기 때문에 미련함을 계속 반복하게 된다.

[26:11]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연단을 많이 받으면 언젠가는 성경을 열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심령 상태가 되지만 이 광야의 연단을 빨리 끝내려면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빨리 끝낼 수 있는 진리의 영이 역사할 수 있도록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몰아 낼 수 있는 신령한 말씀의 실체가 역사하여 귀신을 몰아내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열리어서 성경을 읽고 보고 듣고 지킬 수 있게 되며 자신의 어두운 영과 혼과 몸을 벗어나 진리에 속한 상태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태가 되지 않은 상태를 양의 문을 정문으로 통과하지 않고 변칙적으로 울타리를 넘어간 상태라 하는 것이며 예복을 입지 않고 천국에서 쫓겨난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의 진리 아닌 진리는 변칙적인 진리이며 실체가 아닌 사람의 가르침이 되거나 거짓이며 허탄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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