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10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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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6:16 조회55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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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는 --주장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은혜-순수한 은혜는 구원의 필요조건의 저하에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그 백성을 위한 몸값으로 하신 것이어서 그것은 삐뚤어지지 않고 파기되지 않고, 바르게 존중함으로서, 그 탁월성이 나타나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몸을 대신하여 구원되는 자에게 또 영원한 형벌에 복종을 당하는 자에게도 그 엄중한 율법은 강제되어 집행되는 것이다.
만일 알미니안주의의 교리가 참이라면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지만 그러한 사람들은 나중에는 멸망되고 그리고 속죄된 자와 같이 보인 많은 자에게 구원은 적용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한 예를 든다면 이교도의 생활에 어떠한 은혜를 지적할 수가 있는가?
또는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부터 무엇을 받았다는 것이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피조물들에 의해서 몇 번이나 방해를 받고 타파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그 뜻은 천사들 사이에는 시키게 할 수 있지만 그 원하는 바를 지상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행하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란 그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단순히 사람들의 구원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죽은 데 대해서 실제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다. 속죄의 성질에 관한 알미니안주의의 견해에서는 만일 인간이 그 권리를 사용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역한다면 --물론 수학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은 다만 하나의 죄인도 구할 수가 없게 되고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목숨에 의한 구속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갖추어 준 하늘의 후사를 아무도 받지 못하고 또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사업은 완전히 실패에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백성을 위해서 "RANSOM 구속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주 : 랜섬이란, 노예의 몸값의 돈이란 의미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주의해야 할 것은 주 예수님이 여기서 많은 사람을 위한 구속이라 하고 , 모든 사람의 구속 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은 일이다.
구속의 성질은 이와 같은 것이다.
즉, 구속이란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지불되고, 받아들여질 때에 그가 지목한 사람을 자동적으로 자유케 하는 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구속이 아니다. 율법은 구속된 자에게 어떠한 책무로부터도 자유를 요구하기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선택된 자만의 구속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사업의 공적은 모든 인간에게 균등하게 전달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영원한 형벌은 누구에게도 정당하게 가해지지 못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 엄한 형벌을 이중으로 - 하나는 대상자에게서, 다음에는 사람들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부정이라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인간에게 넓히지 말고 그리스도가 그 때문에 보증을 서주시는 자에게, 한정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속죄는 유효한 것이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라고 예수님이 말씀했을 때에 예수님 자신은 그 죽음의 목적을 제한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만일 그가 자신의 목숨을 양을 위해서 버리신 것이라면 그의 사업의 속죄적 성격은 결코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가 내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요10:16) "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8:44) 라고 말한다.
주 예수께서 이와 같이 그들을 지적하고 제외한 것을 알면서, 도대체 누구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 존귀한 목숨을 버리셨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는 "내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0~21) 라고 고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모든 백성은 아니며 자기 자신의 백성이라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은 절대로 헛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고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선택된 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속되는 자, 성령에 의해서 깨끗함을 입은 자--바꾸어 말한다면 선택, 구속, 거룩하게 되는 것은 동일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나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이나 요한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며, 바로 왕이나 가룟 유다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산양이지 양은 아니다. 우리들은 바로나 유다가 그리스도의 벗이며,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가르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류는 두 종류로 분류된다. 그리고 그 한편에 있어서는 명확하게 긍정되지만, 한편에 있어서는 암암리에 부정된다.
그리스도가 그 백성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균등하게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무질서한 전체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아니다. 그의 백성, 그의 신부, 그의 교회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농부는 자기의 밭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거기 나는 식물을 균등하게 ~가라지도 밀도 ~돌본다고 생각할 자는 없을 것이다.
옛날의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과 우리들의 대 제사장인 그리스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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