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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론의 새로운 개혁주의적 고찰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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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7 13:28 조회3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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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성령이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하나님 인식론과 관련되며 성령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하나의 해석학적 통로로 간주되기도 한다.

성령에 대한 이해와 이러한 경향에서 자주 강조되는 주제는 말씀이다.

 

4. 주지 주의적 이해

 

1)성령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전통은 성령을 의지와 관련 짓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또한 성령이 인간과 관계를 맞을 때에 인간의 의지와 종종 연결된다.

성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의 위치를 의지와 연결시켜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대개 성령을 지성이나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비유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면 그는 삼위일체를 기억, 지성, 사랑 등으로 설명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 혹은 의지로 비유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이 의지로 이해될 때는 흔히 동시에 성령이 사랑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에 의하면 성령은 사랑하시는 자 성부와 사랑 받는 자 성자 사이에서 그 두 분을 연합시키는 사랑 자체이다.

 

2)성령이 사랑과 의지와 연관될 때 자연히 인간에게 역사 하시는 초점은 윤리적 문제가 된다.

이러한 경향은 흔히 성령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거룩한 삶, 즉 사랑으로 대표되는 삶을 살도록 변화시켜주며 행하게 하는 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흔히 "성령 받았다는 것이 무엇이냐?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아니냐?" 는 말을 듣는데 이것은 바로 주의 주의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3)주의 주의적 예의 또 다른 예는 죠나단 에드워즈이다. 그는 참되게 성령을 받은 표로서 즉 성령 받은 열매로써 선한 행실의 윤리적 열매를 맺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런 것은 주의 주의적 경향의 특징이다. 대표적인 신학자로서는 라인홀드 제베크와 본회퍼가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사랑이나 윤리 일변도로 나가는 것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도덕주의적으로 축소시키거나 성령의 하나님 인식에 관한 역사나 성령의 권능적 역사를 간과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위험도 있다.

 

5. 감정 주의적 이해

 

1)성령에 대한 이해 중에서 아마도 가장 비난을 많이 받고 오해되는 것이 바로 감정 주의적 견해이다. 주지 주의적 견해를 가진 쪽에서는 열성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며 어떤 신비현상을 추구하는 것을 흔히 감정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감정의 요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과연 성경은 성령이 하나님의 인격적인 영으로서 그 자신이 어떤 감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시는 영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또한 성령은 인간의 감정적인 측면과도 어떤 관계를 맺는다고 볼 수 있다.

 

2)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이성적이고 형이상적인 이론이나 도덕적 행위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감정의 면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 혹은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을 명백히 감정적 역사라고 정의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부흥사들이나 부흥운동을 추구하는 신학자들 중에서는 방법론적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감정적 흥분 상태로 인간의 영혼을 뒤흔들어 복종치 않는 장애물들을 극복하여 회개하고 믿게 한다.

성령은 이 감정적 흥분상태를 이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을 방법론적으로 흥분시키는 것이 성령의 사역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은 성서적으로 명백한 근거가 없다.

 

3)최근에 성령에 의한 치유를 생각하는 관심이 높아지면서 '내적 치유'라는 사역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성령과 인간의 감정의 직접적 관계를 긍정적으로 드러내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내적 치유란 단순히 신체적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의 병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령의 정서적인 사역은 이러한 치유를 가져오고 사람을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분명히 감정, 올바른 근거를 가지고 있고 그 표현이 건전한 감정, 그리고 정서적 치유는 참된 신앙생활의 일면이요 성령의 역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과 질서의 영인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바른 분별이 없이 감정에 치우치면 헛된 망상에 빠질 위험이 있다.

 

6. 공동체를 세우시는 성령

 

1)신약성서에서 성령은 교회를 세우신 영이요 그 교회 안에서 성도들로 하여금 유무상통하며 공동생활을 하게 한 영이다.

바울도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성령의 전임을 말하였다. 그러나 너무 자주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축복만이 강조되고 각 개인이 받은 은사들과 그 신비함만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은사는 그 신비스러움에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공동체를 위한 겸손한 섬김에 그 의미가 있다.

 

2)한 개인의 영적인 복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축복의 도구이다.

한 개인의 구원은 목적인 동시에 도구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개신교 안에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자라나게 되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교회나 공동체와의 관계보다는 개인이 믿고 구원받는 것과의 관련이 관건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해명함에 있어서 교회와 성령의 관계 혹은 성령의 역사의 공동체적 차원은 철저히 규명되지 않았다.

 

3)성령의 공동체적 차원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 새롭게 강조되고 발전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에서 성령에 대한 이해가 종종 개인주의적 편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구원은 우리를 한 추상적 개인으로서 구원하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인 하나님의 나라에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적 차원에 대한 강조가 지나쳐서 성령을 인간 집단 안에 내재하는 한낱 공동체정신으로 전락시키거나 이 세상에서 사회 변혁을 일으키는 단순한 혁명 정신으로 치부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령이 인간들만의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공동체를 새롭게 갱신하는 영은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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