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정통구원론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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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1-02 21:44 조회69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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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성을 보장하며, 이후에 논의될 하나님의 구원의 서정이 하나님의 의도와 열심히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예정론에 대해서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의 대립 뿐 아니라 신정통주의(Karl Barth)의 입장 등 여러 이견들이 있지만, 우리는 칼빈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6)
2) 신비적 연합
이후에 제시될 구원의 서정을 구슬로 비유한다면, 이 구슬들을 꿰는 실과 같은 것이 바로 신비적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적 연합이란, 간단히 말해서 택함을 입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갈 2:20에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나는 것을 신비적 연합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중재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며, 택자 각 개인이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또한 교회의 다른 형제들과 연합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예정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 하여 우리의 구원의 서정이 이루어진다. 사실 이후에 다루게 될 9가지의 구원의 서정은 모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에 의해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소명(부르심)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제시되는 것이 부르심이다. 이는 논리적으로는 예정 다음에 오는데,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에 의하면, 부르시기 전에 예정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셈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구원에로 부르시며, 이 부르심은 보편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마련인데, 우리는 이를 "효과적 부르심, 내적 소명"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부르심을 "외적 소명"이라고 부른다. 내적 소명은 성령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참 구주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4) 중생(거듭남) - 회심(돌이킴) - 신앙(믿음)
중생과 회심과 믿음은 하나의 사건의 세 가지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중생과 회심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굳이 구별하자면, 같은 사건에 대해서 중생이란 하나님 편에서 본 것이고, 회심과 신앙이란 인간 편에서 본 것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회심이란 이전의 삶으로부터의 돌이킴인데, 그 돌이킴은 곧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며, 바로 그 하나님을 향함이 곧 믿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논리적 순서의 문제가 있다. 칼빈주의에서는 소명 이후에 중생이 처음으로 따라오게 된다. 그러나 알미니안은 회심이 중생보다 앞선다. "문제는 내부에서의 하나님의 중생의 사역 때문에 인간이 회심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회개와 믿음 때문에 개인을 중생시키시느냐? 에 관한 것이다."7) 즉, 이 중생-회심-신앙 사건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이지만, 이것이 하나님, 즉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고백하기에 중생을 먼저 두게 된다. 그리고 돌이키는 것과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또한 하나의 사건이지만, 논리의 순서로 보았을 때 돌이키는 것이 먼저이므로, 회심이 신앙에 앞서게 된다.
"중생에 있어서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사람들에 관해 논할 때에도 요한은 말하기를,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라고 했는데, 여기서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을 가리키고 우리 인간의 의지로는 그렇게 태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8) 중생은 "우리 안에서 영적인 생명을 일깨워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옮기는 하나님의 행위"9)이다. 그리고, "이 정의에 따르면 중생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 이전에 온다고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것도 바로 이 하나님의 행위이다."10)
거듭난 자들은 지금까지의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회심이요, 신앙이다. 이것은 지식, 승인, 그리고 개인적인 결심을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은 맹목이요, 거짓일 뿐이다. 그것은 복음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알고 이해할 뿐, 그것이 진리라고 승인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회심-신앙이라 할 수 없다. 진정 구원을 얻는 회심과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알고, 승인할 뿐 아니라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며, 자신의 삶을 완전히 그에게 의탁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지식이 자라남에 따라 그 승인의 폭도 커지고, 또한 그리스도께 맡겨버릴 부분도 점점 더 커지는 것이다.
5) 칭의(의롭다 함) - 수양(양자 됨)
칭의와 수양 역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칭의는 법정적인 용어인 반면, 수양은 관계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주로 칭의를 먼저 말한다. 칭의는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을 보면, 칭의는 신앙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논리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선포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법적 지위가 죄인의 위치가 아니라 의인의 위치에 오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양도 칭의와 같이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에 의하여, 믿음에 의해서 양자됨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히브리적 개념에서는 의롭다 함과 특별한 관계에 들어감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중생이나, 칭의에 비해서 수양 교리는 우리가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6) 성화(거룩하게 됨) - 견인(이끌어 주심)
성화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결정적 성화이며, 또 하나는 점진적 성화이다. 결정적 성화란 중생과 함께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점진적 성화란 성도가 그 삶 가운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가며 거룩한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거룩하다"는 말을 통해서는 주로 결정적 성화를 말한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고전 9:27 등에서 말하는 것은 날마다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점진적 성화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 바로 견인이다. 하나님께서는 점진적 성화의 과정을 겪는 자기 백성들을 놓지 않으시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주신다. 알미니안의 경우에는 이 견인의 교리가 확고하지 않다. 그렇다보니 자신의 구원이 늘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즉 구원의 확신이 없게 되는 것이다.
7) 영화(영광스럽게 됨)
구원의 서정에서 마지막은 영화로 끝난다. 즉 구원받은 무리들은 사후에 하나님 앞에 서서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되며, 최종 종말에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구원의 서정에 포함시키지 않는데, 이는 이것이 현재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롬 8:30에 의하면, 부름을 받아 칭의를 얻은 자들은 영화롭게 되었다. 이는 그 확실성을 나타낸 표현이면서 또한 구원받은 자들이 영광스러운 지위에 이미 올라있음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Ⅱ. 뻘콥 조직신학(구원론) 요약 및 평가
Ⅰ. 구원론 개요
구원론은 구원의 축복을 죄인들에게 전달하는 것과 또한 죄인이 신적인 은혜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의 생활에로 회복되는 것을 취급하고 있다. 즉 회복과 구속 그리고 갱신을 다룬다. 성경은 구원의 순서에 대하여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어서 상이한 의견이 많이 있다. 개혁파의 구원론은 그 출발점을 그리스도와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사이의 “구속의 언약”에서 성립된 신비적 연합에 두고 있는데, 그 효능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백성에게 영원히 전가되는 것이다. 다수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구원의 순서를 중생이나 소명으로 시작하고 다음으로 회개와 신앙을 포함하는 회심을 그리고 칭의와 성화 마지막으로 성도들의 견인과 최종적인 영화를 논의한다. 루터파에서는 소명, 조명, 회개, 중생은 준비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으로 갱신과 성화(즉 순종의 생활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를 말한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충족한 은혜(gratia sufficiens)와 협력 은혜(gratia co-operans)가 구원에 관계된다. 알미니안파의 견해는 구원 사역을 하나님께 귀속시키지만 실제적으로는 사람의 태도와 행위에 따라 변하는 것이 된다. 즉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되어 있지만 하나님에게 열납되는 것은 율법에 대한 순종, 즉 복음적 순종에 의거된다고 한다.
Ⅱ.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
삼위적 구별이 구약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사역을 독자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성령은 단순히 능력이 아니라 인격이시고 다양한 직무와 관련하여 재능을 부여하시고 계시의 영으로 예언자 안에 역사하셨다. 성령의 일반 사역은 자연의 창조의 생활과 관련하여 유지, 발전, 지도하시며 사람들이나 사회의 생활에서 타락과 파멸로부터 보호하시고 어떤 규칙이나 예법을 유지케 하시고 선하고 의로운 것을 행하게 하신다.
또한 성령은 신적 은혜의 시여자(施輿者)로서 사역하신다. 은혜는 구약에서 “총애”나 “호의”를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신약에서는 사람의 마음에 시행된 하나님의 무상한 사역을 의미한다. 구속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이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이룩한 준비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값없이 주어진 용서에 적용된다. 구원사역의 축복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지고 사람들의 예상된 공로들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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