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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12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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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6:35 조회6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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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모든 의심을 일소한다.

다윗의 이 말이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신과 같은 신자들에 대한 것임은 명백하다. 그것은 그가 여기서 그의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을 한 번만 가질 것이 아니라, 평생 지녀야 한다. 끝으로, 값없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소식은 하루 이틀만 전할 것이 아니며, 이 전도 사명은 교회 안에서 항구적인 것이라고 바울은 증거한다(고후 5 : 18-19 참조).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죽는 날까지 여기서 묘사된 의 이외에 다른 의가 없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영원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원히 효력을 나타낸다. , 정화와 보속과 속죄와, 끝으로 우리의 모든 불의를 가리우는 완전한 순종을 실현할 수 있다. 에베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우리가 은혜에서 구원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고, 은혜를 통하여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한다(2 : 8-9).

 

10) 어떠한 경우에도 행위가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철학자들은 사물이 형성되는 데는 네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원인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행위는 어떤 원인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 동력인(動力人)은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물론 질료인(質料人)은 그리스도시다.

그는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서 의를 지으셨다. 형상인은 믿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한은 이 세 가지 원인을 한 문장에 포함시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 : 16). 목적인에 관해서는, 사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인애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같은 곳에서 다른 세 가지도 명백하게 말한다.

로마서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 : 23-24, 1 : 6 참조)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자비로 우리를 포용하신 것을 제일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라고 한다(3 : 24). 우리의 의를 실현하기 위한 질료인이 여기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3 : 25)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형상인을 가르친다.

끝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3 : 26) 부언한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인을 가리킨다.

겸해서 이의는 화목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화목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고 언급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도 사도는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는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로 그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이 일은 그리스도의 중재로 실현되었으며 믿음으로 받게 되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완전히 빛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1 : 3-14).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그 모든 부분이 우리의 밖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행위를 믿거나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아무리 반대하는 원수라도 만일 성경 전체를 부인할 생각이 없다면, 동력인이나 목적인에 대해서 우리와 논쟁을 일으킬 수 없다. 그들은 질료인과 형상인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졌고 마치 우리의 행위가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와 병행하여 자리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이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생각에 대해서도 큰 소리로 반대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동시에 생명이시며 은혜로서의 이의는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가르칠 뿐이다.

 

11) 그러나 선행의 모습은 믿음을 강하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의 결백과 정직함을 기억함으로써 힘과 위로를 얻으며, 때로는 서슴지 않고 그것을 공언하기도 한다. 여기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기의 선한 입장과 악인들의 악한 입장을 비교해서 자기의 승리를 믿는 것이다. 자기의 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정죄 받는 것이 당연하고 공정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검토할 때에 양심이 깨끗한 것을 느낌으로써 다소의 위로와 자신을 얻는 것이다.

첫째 이유는 후에 고찰하겠다. 여기서는 둘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위에서 한 말과 어느 정도로 일치하는가를 간단히 설명하겠다. 하나님의 심판 하에서 사람은 행위를 의지하거나 행위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말했다. 합치점은 이것이다.

, 성도들은 자기의 구원의 기초를 놓으며 굳게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행위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만을 우러러본다.

복의 시초는 하나님의 선에 있다고 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로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복의 완성이라고 믿고 그 안에서 안주한다. 이와 같은 기초 위에 수립된 양심은 행위를 생각할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확립된다.

, 그 행위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를 무관하시는 증거인 때에 한해서 양심은 그 행위에 자신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우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지 않으면, 행위에 대한 이 자신은 설 곳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그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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