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주신 비밀 남보석 마태복음 5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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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1-02 15:17 조회5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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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말씀한다.
이제 금식의 문제에 왔다.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께 질문을 던진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하니하나이까?
주님께 질문을 던졌다. 당시 까지만 해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금식에 대한 필요성을 말씀하지 않으셨고 제자들 역시 금식을 언제 어느 때에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참으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도 금식을 하기는 했으나 그리스도가 없는 금식을 했다는 것이다. 실로 의미 없는 종교적 관념의 금식에 불과 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님이 없는 가운데 하는 금식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절기를 따라 금식하고 어떤 원칙의 의한 금식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주님의 임재가 있는 가운데 금식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주님께 분명하게 밝히 보이시고 계시는 것이다.
오늘 주님은 금식의 대한 답변에 신랑이라고 언급하심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답변하신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럴 수 없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사역하시고 계시는 동안에 제자들을 혼인집 아들들로 비유하시는 것으로 계시하셨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혼인집이며 잔치의 시간들임을 계시하신다. 이들은 훗날 주님의 영적 신부가 되었음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밝히 말씀하여 주신다.
주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는 데 그 때부터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신랑을 빼앗긴 다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고 장사 된지 삼일 만에 부활 하여셔 승천하신 후 부터 제자들을 중심으로 택한 모든 자녀들이 금식할 것을 계시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알았다.
금식은 신랑을 잃었을 때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부터 주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 금식하는 것이 매우 영적이고 바람직하다는 것을 말이다.
a. 금식은 신랑을 잃었을 때 하는 것이다.
b. 금식은 주님이 내게 주신 먹는 권한까지도 내려놓고 주님의 절대 주권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금식이다.
c. 주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 금식하는 것이다.
d. 금식은 주님을 다시 영으로 영접하고 신부가 되어 영원한 삶 을 주를 위해 살기 위해 매우 필요한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 씀 하시는 것이다.
16절~17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말씀한다.
우리는 먼저 생베 조작의 계시하신 주님의 의도를 볼 필요가 있다.
‘생베 조각’
(άγνάφου πάκους έπιβάλημα 아그나푸 라쿠스 에피발레마)
가공되지 않는 옷감
아직 처리되지 않는 옷감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주님께서 아직 십자가의 달리셔서 물과 피를 흘리시고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상황을 이렇게 계시하신 것이다.
‘낡은 옷’ (παλαιω ιματίω 팔라이오 히마티오)
오래된 옷, 거의 쓸모없이 되어 버린 옷을 의미한다.
낡은 옷은 구약의 종교의 방식으로 주님을 만나려고 하고 주님을 알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새 옷과 조화를 이룰 수 없음을 계시하신다.
오늘날 근대주의자 중에 자신들의 행위를 변화시키기 위해 예수님의 인간적인 행동을 모방하려 한다.
이들에게 더 큰 문제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것을 모방하는 것 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단들이 많은 종교로 주님을 모방하고 성경을 모방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새 옷감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다는 것이다.
아무리 낡은 옷에 새 옷감을 붙여서 손질해도 어울리지 않으며 결국은 낡은 옷이 찢어져서 새 옷감마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실제로 낡은 옷은 영적으로 보면 이렇게 볼 수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력의 의한 선한행동, 종교적인 행동들을 함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의 의는 주님의 의와 하나 될 수 없다. 구약의 종교의 모든 것은 주님의 새로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과 하나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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