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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10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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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6:13 조회6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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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알미니안주의는 제공된 은혜의 수용을 결정하는바 인간의 신앙과 순종하는 행위를 강조한다.

신비 중의 신비는 무한의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이 유죄한 인류의 전부를 구원에 선택하셨다는 사실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예정은 예지위에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예지되는 것은 확정된 것이다.

그리고 예지된 자만이 한정된 자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 선택의 교리가 혹은 일반적으로 예정까지도 예지위에 세울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구절로서 곧잘 지적을 받는 절이다.

로마서 8:29~30"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였으니 이는 그도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 있는 "아는"이란 말은 곧 단지 있는 일을 인지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에 쓰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와 같이 "알려진" 자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특별함이며, 독특한 대상이란 것을 보여준다.

이것을 유대인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3:2)라고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바울이 "미리 정한다," 라는 선택이 단순히 예지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써먹는다면 그것은, 선택이 다만 하나님의 뜻에 의한다는 성경에 어디에서나 보이는 그의 주장과 모순이 된다는 점에 같이 주의를 해야만 되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의 견해는 선택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손으로 넘겨진다.

이것은 전능자인 하나님의 목적을 배신한 인간의 불확실한 의지에 의해서 조건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일시적인 사건을 영원적인 행위의 원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 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옳은 일을 하도록 고심을 하면서도, 언제나 그들의 사악한 의지로 배신당하는 마음씨 좋은 아버지와 같이 취급하려고 한다.

이처럼 바보 같은 교리는 다만 비성경적이고 불합리일 뿐 아니라 정녕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해야만 된다.

원래 인간의 신앙도 또 하나님의 은사이며 회개도 또 하나님의 은사였다. "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이방인에게도 주셨다"(11:18) 는 것이다. "모태로 부터 성령의 충만을 입어"(15)라 한 것과 같이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인 것이다.

빌립보서2:12~13절에서 우리들이 두려워 떨며 자기 구원의 달성에 힘써야 한다고 격려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그 뜻과 업을 향해 나가기 때문이다. 회심이란? 하나님의 파격적이고 주권적인 은사다.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어떠한 영적인 선을 행하는데도 그것에 앞서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전향되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며 그가 그것을 행할 것을 예견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22:14~15) 하나님의 자애의 성질이 두드리는 자를 위해서 열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두드리게 하고 그리고 구하게 하는 것이다. 선행이 구원의 근거는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열매 또는 증거로서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물론 이 견해는 이에 관한 신빙성에 따른다. 그것은 자연인이 생각할 수 있는 견해는 아니다.----그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부름 받지 않는 한,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우리들의 편견 또는 선입관념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정에 관한 성경의 태도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행위는 창조자인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의 법정에서 심판하는 일이 되며, 우리들이 자기가 이해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지혜와 그 공의를 부인하게 되며 게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허망, 기만이라고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그 지혜를 가지고 씻지 않은 더러운 손으로 감히 하나님의 깊은 신비를 알려고 하는 것은 실로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건방진 행위이다.

대 사도 바울조차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겠느뇨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11:33~34)라고 말씀할 정도였다.

선택의 교리를 지지하면서도 정죄되어 있는 자를 멸망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교리를 부정하는 자에게 한마디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쪼록 시종일관해 주기를 바란다는 사실이다.

전자를 긍정하고 후자를 부정하는 것은 예정의 제정을 이치가 안 맞는 것이라 하여 한쪽에 기울어진 취급을 하는 거라고 욕을 면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전자에 관해서 성명을 보내면서 후자를 부정하는 신앙은 한쪽 날개로 날아보려고 하는 독수리와 같은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정죄의 주권까지도 선택의 주권과 같은 것으로 명확하게 단정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주권적으로 야곱을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고, 한가지로 하나님을 주권적으로 에서를 미워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가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자를 불쌍하게 생각한다고 언명한다면 동시에 그는 하나님은 그 원하는 자를 완고하게 하신다고 언명하는 것이다. (9장 참조) 잠언 16:4절 에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고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악한 자에게 있어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어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8)라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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