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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12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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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6:31 조회6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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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어떤 때에는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3 : 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나의 약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불멸에 대한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2 : 12)였음을 기억하라고 권하면서 그들은 할례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2 : 11). 여기서 사도는 약속의 표를19 받지 않은 사람들은 약속 자체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환유법으로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에 내려오며 그 피조물들에 많은 능력을 주기 때문에 그만큼 능력이 감소된다고 항의한다.

우리는 피조물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주요 심판자이시며 따라서 그분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수단과 도구를 사용하셔서 만물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다.

우리의 육신에 빵과 또 다른 음식을 주시며 태양으로 세계를 비추시고 열로 따뜻하게 하신다. 그러나 빵과 해와 불도 주께서 이런 도구들로써 그의 복을 우리들에게 나눠주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례로써 믿음을 영적으로 자라게 하신다. 성례의 한 가지 기능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눈앞에 놓고 우리가 볼 수 있게 하는 것, 아니 우리에게 약속의 담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관대하심과 자비로 우리가 사용하도록 마련해 주신 다른 피조물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유용하시는 일꾼이다.

피조물을 우리의 유익의 원인이라고 찬양하며 선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와 같이 우리는 성례 자체를 믿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성례에 옮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믿음과 고백은 모든 것을 제쳐놓고 성례와 만물의 근원이신 분을 향해서 비약해야 한다.

 

10) sacramentum의 단어

어떤 사람들은 sacramentum이란 말에서 논거를 끄집어내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 그들은 이름난 문필가들이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했지만 "표징"에 해당하는 뜻은 한 가지 뿐이라고 말한다.

즉 이 말은 군인이 입대할 때에 사령관 앞에서 행하는 엄숙한 선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신병들이 이 군대의 선서로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을 약속하며 군대 복무를 고백한 것같이, 우리는 우리의 표징으로 우리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그의 군기 아래서 복무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다른 비교를 덧붙임으로써 그 뜻을 보다 분명하게 한다. 로마 사람은 토가(겉옷의 일종)를 입고 희랍 사람은 팔리움(겉옷의 일종)을 입었으며 로마에서 각 계급에 독특한 표지가 있었던 것같이(원로원 계급을 기사 계급과 구별한 자색 옷과 초승달 모양의 신, 기사 계급을 평민과 구별한 반지), 우리는 우리를 불신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의 상징들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으로 보아, 고대인들은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표징에 적용했을 때 라틴 문인들이 사용한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내서 거룩한 표징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더 깊이 연구해 보면, 고대인들이 이 말을 현재와 같은 뜻으로 옮긴 것은 "믿음(faith)"이란 말을 사용할 때에 나타난 것과 같은 유추법을 따른 것이다. 믿음은 약속을 지키는 성실성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들은 그것을 사람이 진리에 대하여 지니는 확신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와 같이 "사크라맨툼(sacramentum)"은 군인이 자기의 사령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행동이었는데, 고대인들은 사령관이 군인들을 입대시키는 행동으로 만들었다.

즉 주께서는 "사크라맨타(sacramentum의 복수)"에 의해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신다(고후 6 : 16, 37 : 27).

그러나 나는 이런 자세한 점은 말하지 않겠다. 나는 이미 분명한 논거로써, 고대인들이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사용했을 때에는 오직 거룩하고 영적인 사물의 표징이라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반대자들이 외적인 표징에서 이끌어 낸 비교들은 인정하지만 그들이 성례의 이차적인 점을 일차적인 것 내지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

성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점이다. 그 다음에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확인해야 한다. 이 둘째 점에 적용한다면 이 비교들은 타당하다.

그러나 일차적인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성례를 제정하신 용도와 목적대로 우리의 믿음을 도우며 우리의 교리를 보충하지 않는다면 이 신비들은 죽은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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