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129/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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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6:36 조회6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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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기초와 상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에 대한 신뢰감을 배척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행위의 공로가 구원에 대한 보조 수단이 된다는 생각으로 돌아가지 말고 값없이 의를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표징(表徵)에 의해서 이 믿음을 강화하는 것을 우리는 금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에서 비치는 광채와 같이 우리 마음을 비추어 선의 최고의 광명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선행의 은혜에 대해서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 선행은 양자의 영이(롬 8 : 15 참조) 우리에게 주신 것을 보여 준다.
12) 행위는 소명에 대한 열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양심의 결백을 느껴 믿음을 강화하며 기뻐할 때에, 그들은 소명의 결과를 보고 자신들이 주의 자녀로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라고 한 솔로몬의 말이나(잠 14 : 26), 성도들이 간혹 기도를 들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명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하는 사실은(창 24 : 40, 왕하 20 : 3) 양심을 강화하기 위한 기초를 놓는데 아무 소용이 없으며 다만 결과적으로 볼 때에만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런 발언들에는 완전한 확신을 확립할 수 있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또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성실은 많은 힘의 흔적이 섞여 있는 것뿐임을 의식한다.
그러나 중생의 결과를 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라고 보며, 이런 신념에서 큰 힘을 얻어 모든 난관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대망하게 된다. 이는 이 중대한 문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체험조차 할 수 있으려면, 우선 확실한 약속으로 보장된 하나님의 선을 깨달아야 한다.
선행을 표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이 체험은 무엇보다도 불확실하고 약한 것이 될 것이다. 행위를 그 자체대로 판단한다면 그 불충분한 순결성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 하는 것과 같이 그 불완전성은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할 것이다.
요컨대,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며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은혜에는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엡 3 : 18).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것이다.
"신자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든지 간에, 아무리 높이 솟으며 아무리 널리 돌아다니더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떠나서는 안되며 전적으로 이 사랑을 명상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지식을 초월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깨달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고 한다(엡 3 : 19).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신자가 모든 싸움에서 승리자가 된다고 자랑한 다음에 곧 첨부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이유를 말한다(롬 8 : 37).
13)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신자들의 자기 확신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성도들이 행위를 의지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행위의 공로에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선을 인식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기들이 선택된 것을 알게 하는 부르심의 표징이라고 여길 뿐이다. 또 그들이 행위를 믿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얻는 의를 조금이라도 멸시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확신은 값없이 받은 의를 의존하며, 이의가 없으면 그 확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생각을 간단하게 그러나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저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시 138 : 8) 말씀드리지 않나이다.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이다(시 77 : 2 참조).
그러나 저는 제 손이 한 일을 천거하지 않나이다. 당신께서 보시고 공로보다 죄를 더욱 많이 발견하실까 하나이다.
제가 말하는 것, 제가 바라는 것,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옵나이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저의 안에서 당신의 행위를 보시고 저의 행위를 보지 마옵소서. 저의 행위를 보신다면 그것을 정죄하실 것이오나, 당신 자신의 행위를 보신다면 거기 면류관을 씌우실 것이옵나이다. 제게 선행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에게서 온 것이옵니다."그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째로, 그에게 무슨 선행이 있다면 그것 안에서 자기 것은 조금도 볼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 이런 행위도 무수한 죄에 압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양심은 확신보다 두려움과 당황함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행에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은혜만을 보시며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시기를 원한다.
14) 때때로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는 이유라고 말하는 의미
주께서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들의 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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