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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문화와 고고학적 고찰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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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6 22:31 조회677회 댓글0건

본문

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본다.58 물론 스키너는 이 본문과 그리스도 사건의 모형론적 관계를 깊이 논의하지는 않는다. 폰 라트도 이를 첫 제사로 보면서 이 기사 가운데는 별 설명 없이 "피 제사가 야웨에게 더 기쁨이 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59

물론 그는 여기서 그 어떤 모형론적인 해석은 시도하지 않고 그 근거를 출애굽기 33:19과 연관되는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일 뿐이라고 한다.

이와 연관되나 좀 다른 입장을 지닌 이는 월터 부르게 만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의적(恣意的)인 자유를 강조하면서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더 선호하신 이유를 찾아보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버려야만 한다고 말한다.60 해밀턴은 때로는 가인의 제사의 문제점이 있음을 시사하면서도 마지막에는 부르게 만과 비슷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에 대해서 후에 신약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61

신약 성경 히브리서에서는 아벨과 가인의 제사 사건을 해석하면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11:4)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유무가 하나님께서 제사와 제물을 열납하신 근거라고 하는 것이다.62 키드너는 "피가 없으므로 가인의 제물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것이다."고 말한다.63

또한 클라인도 "아벨의 제사에도 속죄적 목적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64 그러므로 키드너나 클라인도 여기서 피 제사의 의미보다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믿음과 동기, 성향 또는 영적인 위치가 중요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65

이런 해석을 하는 이들은 가인과 아벨이 어떤 믿음과 어떤 동기를 가졌느냐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아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히브리서의 말씀을 따르는 해석과는 달리 가인의 제물은 흠이 있는 제물이고 정성이 부족한 것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는 유대인들의 해석이 있다.66

이와 비슷하게 카일은 아벨은 정선된 것을 가져 왔지만, 가인은 첫 열매가 아닌 것을 선택할 정도의 마음과 태도밖에 갖지 않았다고 말한다.67

고든 웬함도 가인의 제물에 비해서 아벨의 제물은 후일의 율법의 제사 규정이 시사하는 바와 비슷하게 정선된 것(the choicest animals from his flock, 'firstlings' and 'their fat portions')이었다는 견해를 가장 일반적인 견해라고 소개하면서 이에 따르고 있다.68

그러나 이 본문 자체에서는

(1) 가인과 아벨의 제물 모두를 "희생제"(??)로 언급하지 않고, "제물"(??)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2) 농부인 가인이 땅의 소산을 바친 것은 목자인 아벨이 "그의 양떼 중에서 첫 열매"를 바친 것만큼이나 그의 직업에 적절한 것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69

그러므로 우리는 스키너와 함께 가인의 "잘못이 하나님을 위해 최선의 것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다"70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히브리서의 해석을 따라서 주어진 계시의 시대의 한도 내에서 이 사건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71

여기까지의 논의를 따라 오다 보면, 이제 우리는 구약 가운데서 모형론적 의미를 지닌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쉽게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세 번째로 거의 모든 사람이 모형론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으로 쉽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을 간단히 언급해 보자. 그것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준 여리고 성의 라합의 창문에 드리운 붉은 줄에 대한 해석이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때부터 여기 언급된 줄의 색이 붉은 색이라는 이유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을 모형화하는 것으로, 그래서 여기서 붉은 줄을 늘여 뜨린 것이 라합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의해 구원받았음에 대한 모형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보다 많은 건전한 해석자들은 이런 모형론적인 해석은 전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72 이런 예를 또 하나 들자면 야곱이 붉은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산 것(25:29-34)에서 그 붉은 것이라는 색 때문에 그리스도의 붉은 피와의 연관성을 생각하는 것도 역시 이런 잘못된 모형론에 속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상당히 건전한 개혁신학자의 논의 가운데 가끔 이상한 상징과 모형론의 추구가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73

잘못된 모형론에 대한 이 논의의 마지막으로 우리가 여기서 같이 생각해 볼 문제를 하나만 제기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창세기 22장에 나타나고 있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사로 드리려고 한 것을 해석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교부들은 이 사건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연결시키는 모형론적 해석을 즐겨 하였는데,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 사건에서 이삭이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주실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type)이 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에서 소위의 대속의 원리를 생각하는 이들이 있어 왔다.

교부들은 그들 시대의 일반적이었던 알레고리적 해석에 분위기 속에서 이 사건으로부터 그 아들을 아낌없이 주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에 묵묵하게 순종하여 죽는 데까지 나아갔던 성자 하나님에 대한 그림자를 찾았었다. 심지어 다른 곳에서는 이런 식의 해석에 아주 반대하는 키드너도 다음과 같은 시사를 주기도 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바침에서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할 수 있다.... 이 한 사건에서 이 조용한 희생자는 선택된 ''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즉 그 선택된 ''가 희생될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74

카일은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만일에 모리아 산이 이삭의 희생 제사의 장소, 그리고 그 대신에 산양을 제사로 드린 장소로 선정된 것이 구약의 희생 제사 제도의 의의와 의도와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모형론적인(typical) 것이라면, 이모형은 이미 미래에 나타날 원형, 즉 천부의 영원한 사랑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을 수행했을 때를 지시했던 것이다.

,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를 이삭이 영적으로만 받았던 진짜 죽음에로 넘겨주셨을 때, 우리도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영원한 생명으로 그와 함께 일어날 때를 (8:32; 6:5 ) 지시했다.75

그러나 여기서 과연 이삭과 그리스도 사이에, 더 나아가 아브라함과 성부 하나님 사이에 그런 모형론적인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반문해 보았으면 한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는다. 이 본문에 대한 모형론적인 해석은 무리하게 본문의 의미를 확장시킨 알레고리에 가까운 해석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 문제를 열려진 과제로 성경신학회의 회원들 앞에 제기한다. 이 본문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어떤 것이든지, 우리가 계시의 의미와 계시 사를 중요시한다면 본문을 무리하게 확대하여 해석하고 하는 일들은 심각한 문제를 가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학적 작업에서 성경 자체가 제시하고 있는 바른 모형론적인 관계를 잘 이끌어 내려고 해야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무리하게 곡해하는 잘못된 모형론은 피하면서 신학적 진술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조직신학이 성경 신학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도움 가운데서 계시 사에 유의하는 신학을 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2) 구속사에 근거한 신학: 신학을 하는 새로운 틀의 구성과 언약 신학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도움은 조직신학 구성에 있어서 구속사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보스나 그를 따르는 개핀은 "구속사적 전망은 성경을 부분적으로든지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필수불가결한 지평"이라고 이해한다.76

계시가 역사적 점진성을 가지고 주어지는 이유는 구속이 역사적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실현에 있어서 획기적(ephocal)이기 때문이다.77

따라서 계시사에 유의하는 것은 곧 구속사에 유의하는 태도를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속사를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신학을 해야 하는데, 구속사에 유의하는 신학은 한편으로는 신학을 하는 새로운 틀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리쳐드 린츠가 앞으로 나타날 복음주의 신학의 방향을 지시하면서 아주 강하게 주장한 요점이다.78

이렇게 까지 구조 전체를 고치지는 않을지라도 조직신학이 구속사의 진전을 유의하면서 작업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주 자명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개혁신학은 언약의 진전을 중심으로 신학을 구성해 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초기부터 성경신학의 도움을 받아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핀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성경의 계시는 그 내용에 관한 한 구속사적 또는 언약적이기 때문이다.79

그러므로 초기부터 언약 개념과 언약 사상을 중심으로 신학적 작업을 해 보려고 하던 개혁파 신학은 코케이우스와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서부터 시작하여 계속 선구적인 성경신학을 진전시켜 왔다고 할 수 있다.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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