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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7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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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5:34 조회5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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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기꺼이 즐거움을 져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그 답은 이렇다. 이런 고통으로 인하여 곤란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도리어 그 고통으로 연단을 받아 용감하게 저항하며 그것을 극복한다면 거기서 신자의 용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비통한 일로 타격을 받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위안에서 안식처를 얻는다면, 거기서 신자의 쾌활함이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으로 생각하나, 스토아(Stoa)적으로 무감각한 것은 아니다.

 

1) 스토아 사상가와 달라서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슬픔을 밖으로 나타낸다.

우리가 슬픔과 고통을 당할 때에 돌과 같이 전연 느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불안 및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칼빈은 고통으로 신음하며 우는 것뿐만 아니라 슬픔과 불안에 시달리는 것까지 죄악으로 본 스토아적인 사고와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 성경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라고 한 것은, 고난과 고통 앞에 일체의 울음을 배격한다는 것이 아니다. 주님도 자신의 불행과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 깊이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2) 현실의 슬픔과 현실의 인내는 서로 충돌한다.

현실에 닥친 슬픔과 고통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도 있고 또한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경건한 신자라면 이 여러 가지 곤란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뜻에 따라 순응하며 전진하겠다는 생각이 충돌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후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 그 역시 앞으로 당할 참혹한 죽음을 생각하며 공포심을 못 이겨 도망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생각하고 자신의 공포심을 극복하고 딛고 일어서서 기꺼이 즐겁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경건한 신자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 앞에서 결론은 언제나 주의 뜻이니, 주의 뜻을 따르자는 그 한 가지 일 것이다.

비록 고통의 가시가 찌르며, 신음의 눈물이 그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 마음을 이렇게까지 요동하게 만드는 이 일들을 기꺼이 참도록 마음을 돌리자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3) 인내에 대한 철학적인 견해와 기독교적인 견해

칼빈은 십자가를 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데서 발견하고 있는데, 이러한 생각과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각은 다름을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철학자들은 고통과 시련에 대하여 부동심(不動心)으로 대응하며 그 고통 앞에서 불가피하니 양보해야 한다는 숙명론에 근거한 효력 없는 인내를 주문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뜻은 첫째 의와 공정이요, 다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숙명이 아니라 이런 생각에서 인내를 권한다. 따라서 우리는 항거는 불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초조와 불안은 하나님의 공의에 반항하는 무례이기 때문에 우리는 참고 견뎌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 앞에 당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니면 생기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질서가 정연한 정의(正義) 이외에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을 참고 견딜 때에 우리는 필연성(또는 숙명)에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는 우리 자신의 유익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통은 분명히 영적인 기쁨으로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 내세에 대한 명상

 

1.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현세에 대한 과도한 애착에서 멀어지게 하신다.

 

1) 허무한 현세 생활

우리의 본성이 이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강한 동물적인 애착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하나님께서는 잘 아시고 우리가 이 애착심에서 너무 오래 잡혀 있지 않도록 우리를 끌어내시며 우리의 태만을 없애버리기 위해 가장 적당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사실 우리의 영혼 전체가 육의 각종 유혹에 빠져 지상에서 행복을 구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현세 생활의 불행을 끊임없이 증명하심으로써 그 허무 성을 가르치신다.

현세 생활은 그 자체만으로 본다면, 불안과 동요와 불행이 무수히 많고 순수한 행복은 아무데도 없다.

인생의 행복이란 것은 모두 확실치 못하며 곧 없어지며 허망하며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이 섞여 있는, 그래서 현세생활에서 우리가 바라고 추구할 수 있는 것은 분투와 노력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의 훈련을 통하여 현세 생활의 불안을 바르게 깨닫고 이 현세의 생활을 철저히 무시해야만 우리는 올바로 전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는 현세 생활의 허무 성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인생은 연기나(102:3) 그림자 같다는 것을(102:11) 유식한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도 제일 잘 아는 속담이다.

사람을 장사하기 위하여 시체를 묻거나 묘지를 통과할 때에 죽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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