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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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5:41 조회70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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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행위대로 판단한다면 그는 정죄를 받아야 할 근거를 자기 속에 느낄 것이다.
2) 그러나 성실하게 자기를 검토하는 신자들에게는, 위선에 사로잡혀 자화자찬하며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과는 다른 근심과 고민을 한다. 즉,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면 무거운 빚이 아직도 자기를 누르고 있으며, 자기 앞에 제시된 조건과는 거리가 먼 것을 깨닫고 절망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근심과 고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흔들리거나, 변하거나, 상하로 동요하거나, 주저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망설이거나, 절망하거나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변함없고 완전한 확신으로 마음을 강하게 하며, 쉴 곳과 설 곳이 있다는 것이다(고전 2:5; 고후 13:4).
4. 자기의 의에 유의하는 것도 약속을 무용하게 만든다.
1) 우리의 공로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의 자비하심이 구원을 이루게 하는 원천이다.
따라서 약속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확고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거저 부르시며 의롭다하신 것이므로, 신앙은 원래 눈을 감고 귀를 곤두세우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들으려고 애쓰며, 사람의 가치나 공로를 전연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2) 신자들은 죄의 용서를 받을 때까지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시면서 수행하신 속죄 행위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었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떨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심한 고통에서만 우리의 평화를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사 9:6), “우리의 화평”(엡 2:14)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통해서만 우리의 양심의 모든 동요를 진정시킬 수 있다.
5.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어야만 양심이 평안하며 기도에 기쁨이 있다.
1)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롬 5:1). 고 확신하지 않으면 양심의 고요한 기쁨을 유지할 수 없다. 동시에 이 확신의 근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다(롬 5:5).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됨을 확신하게 될 때, 우리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39)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에 이르게 된다.
2) 칼빈에 따르면, 칭의에 관해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일에 무엇을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미 지난달에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은 믿음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배제한 그 어떤 신학적 이론도 논의할 의미가 없다. 그런데 칼빈은 칭의를 논하기 전에 중생과 회개를 먼저 언급하였는데 (그 이유는 믿음은 결코 선행을 결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칭의를 논하기 전에 “성도들의 선행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칼빈의 ‘구원의 서정’(序程 ordo salutis)을 말함에 있어 이미 언급한 중생과 성화는 물론 칭의론에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전제되어야 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칼빈은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요시 여겼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터 잡은 칼빈의 ‘구원의 서정’(序程 ordo salutis)은 어떻게 정리해 볼 수 있을까?
그 대강을 개관한다면 다음과 같다.
믿음이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인한 믿음과, 나아가 그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곧 이중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과정(ordo)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이중의 은혜란 무엇일까?
칼빈의 논의에 따르면
“첫째로 믿음은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심판자 대신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성령)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힘써 하게 되는 것”이라 본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이중의 은혜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를 두고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선행한다는 점이며, 이러한 연합을 통하여 은혜가 파생적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 이중의 은혜(유익)가 칭의와 성화(중생)이다.
그런데 칼빈에 따르면 믿음으로 인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로부터 이중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므로, 칭의와 성화는 구별 할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분리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성령의 역사로서의 믿음→그리스도와의 연합→이중의 은혜=칭의와 성화(중생)]
그렇다면 칼빈은 칭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하며 이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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