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8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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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5:40 조회66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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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포와 고민만이 넘쳐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저주 받기에 충분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칼빈은 모든 사람이 하늘 재판관 앞에서 자기의 죄책을 인정하며, 용서를 받고자 기꺼이 엎드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칭의 논의 전체는 어리석고 무력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2) 사람 앞의 의와 하나님 앞의 의
우리가 태양을 볼 때 그 태양의 엄청난 광채로 말미암아 시력이 마비되는 것을 경험한다. 이처럼 정작 우리가 무엇을 판단하고 식별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고 자부하지만, 태양빛조차도 비길 데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앞에서는 한없이 보잘 것 없고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을 따라 인간의 본성을 바로 직시하게 되면,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 9:2-3)라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행위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3) 진정한 의의 증인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어거스틴(Augustinus)은 “경건한 사람은 모두 이 썩을 육신의 짐을 지고 현세의 생명의 연약함 중에서 신음하면서 한 가지 의망을 품고 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시며,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만이 그 희망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베르나르드(Bernard)는 “구주의 상처를 제외한다면 약한 자가 안전하고 든든하게 쉴 곳이 어디 있는가?”
“구주의 힘이 강할수록 더욱 안심하고 거기서 산다.”…“나는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노래할 것인가?” “오, 주여, 저는 당신의 의만을 기억하겠나이다.”라고 했다.
6.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인 자기비판은 선행이 있노라는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1)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생각하면 모든 자기 기반이 없어진다.
밤에 찬란한 별들이 태양 앞에서 빛을 잃는다면, 사람의 가장 희귀한 순진성일지라도 하나님의 순결과 비교할 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지금 밖에 보이는 선행만을 존중하며 자랑하지만, 하나님의 순결성 앞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결한 의지뿐이다.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속이며 자기에게 아첨하는 그 위선도 같은 운명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같이 진지하게 진정한 의미의 의의 규준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행위를 그 자체의 가치대로 판단한다면, 모두 쓰레기와 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보통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순전히 불의이며 정직이라고 보는 것은 부패이며,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치욕이다.
2) 모든 자기 찬양을 버리라
하나님의 완전성을 생각해 본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자기에 대한 아첨이나 맹목적인 사랑을 일체 버리고, 자기를 검토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쓰고 있는 의의 가면 때문에 우쭐해 하지만, 주께서는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불결을 저울에다 다신다.
그러므로 자기 검토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심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러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 25:4, 6)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망각함으로 인하여 구속의 은혜를 모르는 인생은 가장 불쌍한 존재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선 교만한 마음을 철저히 꺾지 않는다면, 속고 있는 것이다. 여기 유명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약 4:6; 잠 3:34).
3)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 겸손인가?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하게 되는 방법은 “철저하게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자기가 아직 무엇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겸손이라 부르지 않는 다”고 말한다.
왜 겸손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 태도 또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하여
첫째로, 우리는 모든 자랑을 버리고 완전히 겸손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힐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둘째로, 이 겸손은 어떤 점잖은 행동으로 우리의 권리의 털끝만한 부분 을 주에게 양보하는 것과도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4)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
우리의 지존하신 주께서는 말씀으로 하는 설명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비유로 올바른 겸손의 모습을 그려 보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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