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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12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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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6:34 조회6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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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지만, 우리의 불완전한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겸손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성경은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7 : 21, 왕상 8 : 46 참조). 그러면 그들은 행위에 의해서 어떤 종류의 의를 얻을 것인가?

내가 우선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행위도 항상 육의 불결로 더럽혀지고 부패해지는데, 이를테면 찌끼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평생 한 일 가운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을 선택하게 하라.

그리고 그 일의 여러 부분을 잘 검토하게 하라. 틀림없이 그는 그런 행동도 어딘가 육의 부패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행에 대한 우리의 열심은 결코 그것이 지녀야 할 성격을 가지지 못하는데, 이는 우리의 큰 약점이 우리의 경주(競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성자들의 행위에 묻은 오점은 비록 극히 작은 것이지만, 우리 눈에 분명히 보인다.

그렇다면 그 오점은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별들까지도 순결하지 못하다(25 : 5). 성자들이 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판단한다면, 공정한 보상으로서 치욕을 받아야 할 것뿐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8)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의 엄격성을 오해하였다.

다음에 전적으로 순결하며 완전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예언자가 말하듯이 죄가 하나라도 있으면 종전의 의에 대한 기억이 말소될 수 있다(18 : 24). 야고보도 "누구든지‥‥‥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2 : 10) 말하면서 이에 찬성한다.

그런데 이 인간 세상은 결코 순결하거나 죄가 없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어떤 의를 체득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뒤를 잇는 죄악들로 인하여 부패해지고 억압되고 소멸되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우리의 의로 인정될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하면, 행위에 의한 의가 문제될 때에는 우리는 율법에 의한 행위를 볼 것이 아니라 계명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한 의를 구할 때에 개개의 행위를 제시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복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미련한 신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죄의 용서를 한 번 우리의 의로 인정하신 것은, 우리가 과거 생활에 대한 용서를 받은 후에는 의를 율법에서 찾으라는 뜻이 아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거짓 희망을 품게 되며 자신을 비웃으며 조롱하게 될 것이다.

이 육신을 쓰고 사는 동안 우리는 완전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율법은 완전히 의로운 행위를 항상 유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죽음과 심판을 선고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언제든지 우리를 고발하며 정죄할 근거가 있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자비가 율법과는 반대로 우리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하심으로써 우리의 무죄를 거듭 선언하신다면 사태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처음에 한 말은 언제든지 성립된다. 만일 우리 자신의 가치에 따라 우리를 판단한다면, 무엇을 계획하며 무엇을 실행하든 간에 또 아무리 많이 노력하며 수고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과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9) 신자들의 의는 언제든지 믿음에 의한 의다.

우리는 두 가지 점을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첫째로, 경건한 사람의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의 엄격한 판단에 따라 검토할 때는 별로 정죄를 면할 수 없다.

 

둘째로, 그런 행위가 있다고(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가정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가 자신이 죄 짐을 지고 있어서 그 행위도 곧 약화되고 오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논쟁하는 중심점이다. 칭의의 기초에 관해서는 비교적 건전한 스콜라 학자들과 우리 사이에 싸울 일이 없다.

즉 죄인은 정죄 받는 것에서부터 값없이 해방되어 의를 얻으며 이 일은 죄의 용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다만 그들은 "칭의"라는 말에 새롭게 됨을,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가 율법에 복종하도록 개조된다는 것을포함시킨다. 참으로 그들은 중생한 사람의 의를 고사하기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한번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선행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며 선행의 공로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주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정하셨다고 선언하신다(4 : 3). 이것은 아브라함이 아직 우상을 섬겼을 때가 아니고, 그가 거룩한 생활을 다년간 훌륭히 계속한 후였다.

그러므로 그는 오랫동안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했으며 죽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율법에 순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을 보아서 우리는 바울의 추리에 따라, 그의 의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단정한다(2 : 9). 마찬가지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 : 4) 예언자의 말은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주께서 믿음으로 전환시켜서 의롭다 하실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신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며 신자들에게 믿음에 의한 생명을 약속한 것이다.

바울도 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하여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3 : 2, 31 : 1, 4 : 7)라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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