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구원론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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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1-02 16:19 조회66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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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칭의가 일어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 곧 화해가 일어나지 않은 곳에는 중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칭의와 중생의 이 두 은혜는 믿음에 의해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칭의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며 칭의 없이는 중생은 일어나지 않는다. 칭의로 중생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칭의는 성화의 시작이다.
그러나 중생 (새로운 자녀의 탄생, 또는 양자됨)은 단 한번의 사건이 아니다. 그리고 부분적인 것이 아니다. 중생은 칭의에서 양자됨과 관련된다. 중생(다른 말로 회개 )은 ‘육이 날마다 죽고 영이 날마다 새롭게 사는 것’이라는 새로운 생명의 원리이다. 그렇다면 중생은 성화와 서로 바꾸어 사용되는 표현이 될 수 있다.
Ⅳ.칼빈의 구원에 있어서 성화의 위치
1.성화의 정의
복음이 회개와 죄의 용서라는 두 제목으로 완전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주께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은 ‘동시에’ 그의 영에 의한 성화를 통한 진정한 의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성화는 칭의와 동시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의 보고가 먼저 열려 죄의 용서 (칭의 또는 화해)가 전파된 다음에 회개를 요구한다. 죄의 용서로 말미암는 칭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둘째 단계인 중생(생활의 변화)을 시작한 후에 평생을 점진적으로 전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중생은 성화이다.
칼빈은 칭의의 지속적인 발전을 성화라고 본다. 그런데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동시에 받는 은혜이다.
그런데 이 두 은혜는 구별된다. 그러나 서로 분리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죄인을 부르실 때 “의롭게 하기 위해서 부르실 뿐만 아니라, 이 의를 기초로 해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부르셨다.”(롬 8:30)
하나님은 의롭게 한자를 본성대로 버려두시고 아무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는가?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은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도 하신다.”(고전 1:30)라고 대답한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의롭게 하는 영이나 거룩하게 하는 영은 성령이다.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는 성화의 실제를 칼빈은 말하고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 화해시키며, 죄를 거저 사해 주시므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날로 더욱더 죽이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성결케 된다.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어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며 우리의 마음은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의 영광만을 증진시킬 것을 무엇보다 먼저 원한다.
우리가 성화의 정의를 이해하는데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칼빈의 경우 거룩의 원천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성화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자연인은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내주로 그 능력이 우리의 육을 날마다 죽일 때 성화는 가능한 것이다. 칼빈은 회개를 육의 죽임과 영의 살림의 두 요소로 보면서 회개를 중생으로 동일시한다. 이 때 중생은 성화와 관계된다.
그리고 중생과 성화는 성령의 역사이다. 그런데 성화는 칭의에 기초한다. 성화는 칭의의 은혜에 더해지는 동일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을 갖는다. 성화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성화는 성도들의 선행이다. 칭의에는 우리의 행위가 관계되지 않지만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도 자신들이 선택된 것을 알게하는 부르심의 표징이다.
성도들의 선행은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이며,이 의가 없으면 그 확신도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선행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선행은 칭의에 의존하고 있다.
칭의 없이는 선행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선행을 자랑하거나 선행에 대하여 교만할 수 없다.
2.성화와 칭의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중생을 칭의보다 먼저 논한다.
칼빈이 칭의보다 중생을 먼저 취급한 것은 “믿음은 선행을 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편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 그리고 이 문제가 관련된 성도의 선행의 문제 (성도의 선행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율법의 저주 아래서 인간이 구원 받을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뿐이다.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붙잡고 소유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이중의 은혜를 받는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심판자 대신에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없고 순결한 생활을 증진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둘째 은혜를 먼저 다룬 것은 믿음은 선행을 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칭의 된다.
우리는 다만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이러한 칭의 교리는 성도의 선행과 관계가 있다.
이 선행이 중요함으로 칼빈은 중생을 먼저 다루었지만 그는 칭의교리를 철저히 토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칭의 교리가 종교의 요점이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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