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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문화와 고고학적 고찰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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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6 22:29 조회6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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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그 자체로는 속죄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10:4).

그러나 그 희생 제사들은 죄를 생각나게 하고(10:3) 결국 그 죄를 사하는 "한 영원한 제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희생 제사와 십자가 사건의 모형론적인 관계는 부인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단지 그 모형론이 과연 언제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성경 신학을 하는 이들이라면 구약 시대에 희생 제사를 드리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 속에 벌써 이런 모형론적인 연관성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고 해야만 한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고 난 후에 구약의 희생 제사 제도의 빛에서 그 사건을 해석하려는 인간적 시도가 나온 것이고, 그것이 상당히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형론은 우리들의 해석에서 온 해석적인 기제(mechanism)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구약에 신약적인 복음이 내재하고 있음을 명확히 말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의 터에서는 과거의 고전적 세대주의자들의 이른 바 "구약 시대는 율법 시대요, 신약은 은혜 시대"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신학 화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계시의 유기성을 잊은 실수가 여기에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는 바르게 온전한 유형론이 있음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 우리들이 흔히들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릇된 모형론이 있기도 하다. 이런 그릇된 모형론의 예들은 다양하다. 특히 구약의 희생 제사가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모형론적 관계성을 생각하면서 그 원칙을 그릇되게 너무 넓게 적용한 예들이 많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대개 후기 시대에 속하는 계시의 자료를 이른 시기에 무리하게 주입시키는 데서 오는 문제점이다.

이는, 머레이가 잘 지적하듯이, "계시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do violence to revelation itself)이기43 때문에 심각한 것이다. 이런 몇 가지 예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바로 전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3:21)는 말씀에 대한 해석에 이런 그릇된 모형론이 동원된 일이 많음을 지적해야 한다.

이런 해석을 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가죽옷이 있으려면 동물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동물을 죽이실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는 결국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그의 희생 제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동물을 희생시키시고, 그 표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이다. 예를 들어서, 프란시스 쉐퍼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독단적 교리로 삼지 않도록 유의하기를 바라지만, 이것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분의 도래를 고대하는 구약 희생제사 제도의 시작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44 또한 클라인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대한 장애에 대한 이 치유는(3:10 참조)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교제에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배려에 함의되어 있는 것은 동물 희생제사 행위이다. 그러나 자명한 것은 희생제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것의 치유적 결과이다."45

이런 해석의 하나로 이 사건과 희생 제사를 연관시키는 해석이 그 본래의 의미에 합치하는 것이라는 스키너와 육축 중에서 동물 희생을 드리는 것의 도입에 대한 야위스트의 이론을 여기서 찾는 로버트슨 스미뜨의 해석도 생각할 수 있다.46

또한 특별히 희생 제사와 연관시키지는 않지만 여기서 입혀 주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구원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이로 피츠버그 신학교의 도날드 고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입혀 주시는 것 자체가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47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성경 신학이 하는 일을 여기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역사를 연구하는 성경 신학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이른 시기에 과연 희생제에 대한 모형론적 계시가 주어졌는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물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동물을 희생시켜, 희생제의 원리를 가르치시려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아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이는 키드너이다.

그는 아주 핵심을 찌르면서 "여기서 구속을 미리 찾아보려고 하는 것은 바르지 않은 것이고 본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고 말한다.48 보스도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이 행위[, 입히시는 행위, covering]에 대해서 사용된 용어가 희생제에 의해서 죄를 속하는 것에 대해서 율법에 사용된 전문적 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는 율법에서 죄를 속하는 데는 전혀 사용하지 않은 '입히다'(to clothe)는 의미의 단어이기 때문이다."고 한다.49

, 여기 입히신 것을 율법에서 죄를 속한다(to make atonement)는 의미로 사용된 '카파르'(??)가 아니라, '입히다'는 뜻의 '라바쉬'(??)의 히필 형인 '얄비쉠'(??)임에 유의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스는 여기서 희생제 제정에 대한 기록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죽옷을 입히신 행위는 오히려 죄를 지어 하나님의 면전과 하나님의 거주지인 에덴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에게조차 그들의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그들에게 섭리적인 보호를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딜만은 이것이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의 계속적인 돌보심을 나타낸다"고 한다. 50

키드너도 비슷한 해석을 제시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궁극적 필요보다는 직접적인 필요를 만족시키시는 것이다.... 가죽옷은 사람의 죄로 인해 필요하게 된 도덕적, 물리적 - 모든 복지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51

11) Murray, "Systematic Theology," p. 6. See also p. 7.

그래서 폰 라트는 여기서 "우리는 창조자가 처음으로 보존자로 나타난 것을 보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52

물론 이를 하나님 앞에 죄 있는 존재가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없듯이, 죄 있는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벗은 채로 있을 수 없고 무엇인가로 가리고 나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즉 이를 인간의 죄성을 상기시키는 행위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53

칼빈이 이런 해석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54 그는 가죽옷이 우리에게 더 수치스럽고 낮은 모습을 갖게끔 했다는 생각에서 이런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상당히 심리적이며 자의적이고, 이로부터 발전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무엇인가를 가리고 가야함을 상기시킨다는 웬함이나 샤일하머의 해석은 이 단어가 후에 제사장들이 특별한 옷을 입고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칭할 때 많이 사용된(28:42 ) 단어라는 점에 대한 고려에서 온 좀 역행적인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 옷을 입하신 행위는 하나님의 배려와 돌보심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55

 

둘째로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문제를 해석하면서도 흔히 이런 잘못된 모형론이 동원되곤 하였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흔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히브리서 9:22 하반 절 말씀에 근거해서 가인의 제물은 그가 농사한 곡식 중에서 드린 것이므로 피흘림이 없는 제사였고, 아벨은 어린양을 잡아 드렸으므로 피 흘림이 있는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그 피 때문에 받으셨다고들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결국 아벨의 제사를 후에 있게 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모형(type)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모형론의 대표적인 예이다.

본문에 나타나는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이유가 피 있는 제물을 드린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성경 자체 내에서 이에 대한 명확한 모형론적인 관계를 시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잘못된 모형론적인 해석을 보급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마도 스코필드 주석 성경일 것이다. 이 책은 창세기 3:21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인의 피 없는 제물은 신적인 방식에 대한 거부였다... 속죄하는 피가 뿌려진(9:22) [아벨의] 희생 제사는 그의 죄 고백이며 동시에 대리물의 개입에 대한(11:4) 그의 신앙의 표현이었던 것이다."56

이런 입장은 세대주의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차이는 세대주의자들은 모형론적 해석을 시도해 보려고 하고, 비평주의적 입장을 지닌 이들은 모형론적 해석에 대해서는 좀 자제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다.

아주 비평주의적 입장의 스키너는 결국 아벨의 제물만을 열납하신 것은 드려진 제물의 종류라고 보는 것이 희생제에 대한 원시적인 셈족의 개념과 더 잘 맞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57 스키너는 이것이 본문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희생제의 시작 또는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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