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론의 새로운 개혁주의적 고찰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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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7 13:28 조회35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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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성령론의 새로운 개혁주의적 고찰
1. 연구 목적과 이해
성령님의 대한 바른 신학의 교육을 통한 인식이 있어야 우리는 올바른 영적인 생활과 교회생활, 사회생활, 개인적인 생활도 주님이 원하시는 데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령님의 대한 바른 이해 부족으로 인하여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은 신학적으로도 말세의 때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더욱더 성경적이며 바른 영적이며 신학적인 바른 정립이 있어야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악한 영들의 속임수를 우리는 분별하여 알고 대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요즘 신학적 바른 이해 부족으로 인하여 이단들이 난무하고 거짓 그리스도가 한국에는 너무나 많다. 물론 전 세계의 어디를 가나 이 문제는 항상 산제되어 있다. 그렇다고 이제 더 이상 방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필자는 이 논문을 준비하게 되었고 논문을 준비하면서 필자 역시도 성령님의 대한 바른 이해 부족을 느끼며 회개하게 되었다.
진실로 지금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과 우리 목회자들이 정통적인 신학을 기초로 하여 성령님을 이해하는 일에 다시 한 번 노력을 기울이고 지나치지 않으며 샤머니즘의 미혹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성령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계기를 삶기를 바라여 이 논문을 준비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교파가 매우 많이 있다. 문제는 교리적인 부분을 인정하는 문제에 있어 같은 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나 깊이 있게 신학을 연구하다 보면 상당히 많은 인식적 차이가 있고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성령님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서로 추구하는 것의 많은 차이를 갖고 있으므로 한국 교회는 여전히 성령님의 대한 이해도 교파마다 매우 이견 차이가 크므로 인해 더욱더 영적인 면에서 많은 문제들을 발견하고 이러한 문제들로 인하여 교회, 가정, 사회생활의 까지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논문을 상고하면서 조금 이나마 성령님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도움이 되 시길 바라여서 연구하게 되었다.
2. 본체론적 이해
1)본체론적이라 함은 성령의 본체(substance)와 본질(essence) 등이 문제의 초점이 되는 경우이다. 여기에서 주로 논의된 것은 성령이 신성을 가진 한 위격으로서 '하나님'으로 인정될 수 있느냐는 문제와 성령이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 그 출처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 등이었다.
2)사실 초대 교회에서는 성령론이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니케아 회의에서는 삼위일체적 형식이 확정되고 성령도 신자들의 믿음의 대상으로 인정되었으나 주 관심은 기독론이었지 성령론이 아니었다.
이러한 경향이 계속되면서 한편으로 기독론 논쟁에 부수적으로 성령론도 차츰 강화되어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는 니케아 신조의 성령에 관한 짧은 언급을 보강하여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광과 예배를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주님이시며, 생명의 수여자"라는 구절을 첨가하였다.
3)서방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성령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으로 이해되면서 성령이 동시에 성부의 영이요 또한 성자의 영으로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는 방향으로 이해되었다.
이에 반하여 동방에서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는 입장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오래된 것이었으나 이것이 격렬한 논쟁으로 비화한 것은 9세기에 샤를레망대제가 filioque(그리고 아들로부터도) 라는 구절을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에 삽입하려고 시도한데서 시작되어 결국 동서교회가 분열되는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4)이러한 논쟁과 교리적 발전의 뒤에는 서양철학에서 모든 존재의 본체와 본질과 그 유래 및 존재들 간의 서열을 문제 삼는 사고의 틀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단적인 예는 중세 스콜라 신학의 '은혜' 개념이다.
중세 스콜라신학에서 성령의 구체적 활동은 '은혜(gratia)라는 말로 대치되었다.
거기에서 은혜는 여러 가지 복잡한 분류에 따라 이해되었는데 거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습성적 은혜(habitual grace)'의 개념이다.
여기서 습성적 은혜는 하나님에 의해 우리 안에 '주입되는 어떤 것이요. 우리 안에 머물러 있어 실제로 우리가 선행을 하게하는 잠재적 습성으로 이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성령의 은혜는 단순히 하나님이 친히 가지시는 태도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따로 존재하는 '피조 된 은혜'요 우리 안에 '어떤 것' 이다. 이런 식으로 성령의 활동에 대한 이해마저도 본체론적 사고에 지배되어진 것이다.
3. 주지주의
1)주지주의라 함은 성령의 본성이나 우리와의 관계를 '이성' 혹은 '지성'이라는 틀 속에서 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성령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오순절주의적인 경향 즉 권능 주의적 이해를 가진 사람들 혹은 성령은 언제든지 비이성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유럽의 철학에 있어서 영은 본래 인간의 지성활동과 쉽게 연관이 되었던 것이다.
2)그러한 사상적 전통에서는 인간의 본질적 부분은 영혼이요 영혼의 가장 고귀한 부분을 이성으로 여기는 대 아무런 거부감도 없었었다.
또 한 하나님을 가장 높은 이성적 존재라고 이해함에도 별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전통을 따르는 기독교 신학에서 성령을 이성과 연관되는 존재로 생각해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3)여기에는 물론 인간 영의 이성적 능력을 신뢰하여 자연신학의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과 인간 이성의 영적 능력의 부패성을 심각히 인정하며 오직 하나님의 특별계시만을 고집하는 계시신학의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이러한 경향에서는 성령 혹은 영을 이성과 혹은 지성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4)중세 스콜라 신학,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주지주의적 경향을 뛰고 있으며 자연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최고의 이성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경우에 있어서도 신앙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선하심을 아는 지식이라는 면에서 설명한다. 물론 여기서 성령의 역사가 단순히 자연적 인간이성과 동일시되거나 성령이 인간 이성의 활동으로 해소되어진다고 보지는 않는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써 지성을 가진 인간의 영을 무한히 초월한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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