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교리에 대하여 118/139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30 16:29 조회650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5. 성례론
("성례"란 말의 뜻 : 성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 1-6)
1) 정의
우리의 믿음을 돕는 또 다른 수단은 성례이며 이것은 복음 선포와 관련되었다. 성례가 만들어진 목적과 현재의 시행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분명한 교리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먼저 우리는 성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간단하고도 적절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성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 시는 외형적인 표식이고, 우리편에서는 그 표식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더 간략하게 정의하면, 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식으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 정의를 택하든지 간에 어거스틴이 내린 정의와 뜻은 차이가 없다. 그는 성례를 "신성한 것의 보이는 표" 또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형태"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의 정의가 내용을 더 분명하게 잘 설명한다. 어거스틴의 정의는 너무 간단해서 애매모호한 곳이 있다.
교육이 부족한 사람은 많이 속기 때문에, 나는 아무 의심도 생기지 않도록 말을 더 많이 사용해서 내용이 더 충실한 표현을 만들기로 했다.
2) "성례"라는 말
성례란 말을 고대인들이 이런 뜻으로 사용한 까닭은 잘 알 수 있다.
당시의 번역자가 희랍어의 (비밀, 신비)를 라틴어로 번역했을 때에, 특히 신성한 사물을 의미할 때에는 반드시 "성례"라고 번역했다.
예컨대, 에베소서에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엡 1 : 9)라고 되어 있다. 또,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엡 3 : 2-3)이라고도 되어 있다. 골로새서에는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골 1 : 26-27)고 되어 있다. 디모데 전서에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딤전 3 : 16)라고 되어 있다. 그는 "비밀(secret)"이란 말을 쓰면 위대한 일을 낮추게 되는 듯해서 그 말을 피하려고 신성한 일에 관계된 "비밀"을 "sacrament"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이런 뜻으로 교부들의 글에도 자주 나타난다. 또 라틴 사람들이 "sacraments"라고 한 것을 헬라 사람들은 "mysteries"라고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말의 뜻이 꼭 같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숭고하고 영적인 사물을 경건하게 나타내는 표징들에도 이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어거스틴도 어디선가 이 점을 말한다. "신성한 사물에 적용되는 여러 가지 표징을 'sacraments'라고 부르는데, 그런 표징들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것은 지루한 일일 것이다."
3) 말씀과 표징
그래서 내가 제시한 정의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례제는 반드시 선행하는 약속이 있으며 성례는 이 약속에 붙인 부록과 같다. 그 목적은 그 약속을 확인하고 인치며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하며 말하자면 비준하는 것이다. 성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우선은 우리의 무지와 우둔함에, 다음에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비하신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기 보다는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 확고부동하며, 자체 이외에서 더 훌륭한 확인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연약해서, 각종 수단을 사용하여 사방으로 붙들어 주고 받쳐 주지 않으면 떨리고 흔들리며 비틀거리다가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의 자비하신 주께서는 그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능력에 자신을 적응시키시며, 우리가 항상 땅에 붙어 기어 다니고 육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영적인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이런 땅에 붙은 것까지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며 육에 있는 우리 앞에 영적인 복의 거울을 두신다.
크리소스톰이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무형의 존재라면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인 복을 무형한 벌거숭이인 채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신체에 접붙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눈에 보이는 것 속에 넣어 주신다.
성례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은사에 물질의 성질을 입히신다는 뜻이 아니고 이런 표시 방법으로 그 은사에 표시를 하신다는 것이다.
4) 말씀은 표징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의 논적들은 성례를 구성하는 것은 말씀과 외형적인 표징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나 믿음이 없이 속삭이는 것, 소리에 불과한 것, 마술사의 주문같이 성례에 사용되는 물질을 성별하는 힘이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말씀을 선포할 때 보이는 표징의 뜻을 우리로 하여금 깨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