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의 5대교리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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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1-02 22:00 조회81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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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미처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알미니우스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알미니우스가 죽고 나자 알미니안의 리더십은 Simon Episcopius와 Jan Uytenbogaert에 의해 자연스럽게 계승되었다. 이때 칼빈주의 진영의 Gomarus와 그의 일부 추종자들은 라이덴 대학으로 부터 알미니안의 신학을 뿌리 뽑으려 했으나 알미니안들이 이에 맞서 1610년에 The Remonstrance라고 하는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표명하는 문서를 발행하게 되어 결국 칼빈주의자들의 노력은 무산 되고 말았다.
이 문서(The Remonstrance)의 핵심적 내용은 전통적 칼빈주의의 신앙원칙에 대항하는 5대 교리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4)
첫째는, 예지 선택이다. 하나님은 예지(forknowledge)의 능력으로 장차 누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지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결코 지옥에 보낼 자를 미리 선택해 두지 않으신다는 주장이다.
둘째로, 무제한적 속죄(unlimited atonement)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인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 적 죽음은 선택된 일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논리이다.
셋째로, 타락한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성령의 도우 심을 떠나 스스로 어떠한 선이나 의를 추구할 수 없지만, 아담의 죄로 인해 결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거나 영원한 정죄를 선고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넷째로,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과 행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저항)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믿음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 있으며 어떠한 유혹과 시험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나 복음을 떠난 행위로 인해 그 구원을 잃을 수도 있으므로 성경공부에 더욱 주력해야 한다.
상기와 같은 알미니안들의 신앙고백서(The Remonstrance)가 발간되자 여기 저기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신학적 문제를 둘러 싼 공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란의 중산층들과 해변 일대의 사람들은 알미니안들을 지지했고, 남부 지역 변두리에 위치한 시민들은 Gomarus와 그의 칼빈주의 동료들을 후원했다.
이와 같은 신학적 분립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 되어 화란 국교회(National Church)에 심한 분란을 가져 왔으며 여러 지방에 지역감정을 유발 시켰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결국 1617년에는 국내전쟁의 위협을 불러 올 만큼 “알미니안 대 칼빈주의의 논쟁”(The Arminian-Calvinist Controversy)은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1617년 11월, 국회는 문제 해결을 위해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로써 1618 년 돌트회의가 소집 되었고 화란, 영국, 스코트랜드, 독일, 스위스에서 파견된 대표들이 참석하였으며, 알미니안들은 이 계기를 통해 최소한 자신들의 견해가 칼빈주의 신학과 동등한 대우를 받거나 각별한 관심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돌트회의는 알미니안들의 이러한 기대와 달리 칼빈주의를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로인해 불가피하게 선출된 13명의 알미니안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변호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돌트회의는 알미니안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지지를 보냈다. 신조가 작성되어 개혁교회 교리들의 주요 내용들이 93개 조항으로 천명되었다. 곧이어 300명이 넘는 알미니안파 목사들이 공직 박탈당했고 15명이 구속 수감되었으며 그 외 많은 사람들이 국외 추방을 당했다.
3. The Canons of Synod of Dort/서유럽의 개혁주의 동향
돌트회의의 규범(The Canons of Synod of Dort)은 알미니안의 5개 항목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책으로 어거스틴과 칼빈의 사상에 근거한 죄와 은혜에 대한 5가지 성경적 교리이다.
이 5대 교리(또는 5대 강령)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차원에서 잠시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개혁주의 동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스위스의 제네바는 종교개혁의 중심도시였다.
쯔빙글리 당시의 스위스 교회들은 제네바를 중심으로 서로 간에 아주 친밀한 교제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의 교회 역시 상당수가 개혁주의 교회였으며 특히 남쪽지방(예를 들면 Heidelberg Catechism을 편찬한 도시들- Hesse, Bremen, Palatinate)같은 경우는 대다수의 교회가 개혁주의 신앙의 노선을 걷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철저히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채택하여 여러 면에서 제네바에 있는 교회들의 모범이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모두가 칼빈주의자들이었으며 Charles II세가 즉위하기 전까지 영국교회 목사들은 청교도 배경이 아니더라도 모두 칼빈주의자들로 일컬음을 받았다. 프랑스에서는 「기독교강론」이 불란서어로 번역되면서 칼빈을 개신교의 지적인 지도자로 높였고, 1558년경에는 소위 “Huguenots"라고 하는 불란서 칼빈주의자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하여 그 추종자가 400,000명에 달했다. 화란의 북쪽 지역 사람들 역시 칼빈주의 신앙의 체계 아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칼빈의 선교적 활력은 서유럽의 대부분을 칼빈주의의 고장으로 만들었고 17세기에 이르러 칼빈주의는 루터란주의를 능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칼빈주의가 16세기와 17세기를 거쳐 서유럽 일대의 개신교회를 주도했다는 사실은 잠시 후 우리가 살펴보게 될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 어떻게 해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고 신학의 원리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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