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의 5대교리 6/17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1-02 21:57 조회66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백성을 위해서 "RANSOM 구속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주 : 랜섬이란, 노예의 몸값의 돈이란 의미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주의해야 할 것은 주 예수님이 여기서 많은 사람을 위한 구속이라 하고 , 모든 사람의 구속 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은 일이다.
구속의 성질은 이와 같은 것이다. 즉, 구속이란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지불되고, 받아들여질 때에 그가 지목한 사람을 자동적으로 자유케 하는 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구속이 아니다. 율법은 구속된 자에게 어떠한 책무로부터도 자유를 요구하기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선택된 자만의 구속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사업의 공적은 모든 인간에게 균등하게 전달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영원한 형벌은 누구에게도 정당하게 가해지지 못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 엄한 형벌을 이중으로 --하나는 대상자에게서, 다음에는 사람들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부정이라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인간에게 넓히지 말고 그리스도가 그 때문에 보증을 서 주시는 자에게, 한정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속죄는 유효한 것이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라고 예수님이 말씀했을 때에 예수님 자신은 그 죽음의 목적을 제한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만일 그가 자신의 목숨을 양을 위해서 버리신 것이라면 그의 사업의 속죄적 성격은 결코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가 내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요10:16) "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8:44) 라고 말한다.
주 예수께서 이와 같이 그들을 지적하고 제외한 것을 알면서, 도대체 누구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 존귀한 목숨을 버리셨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는 "내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0~21) 라고 고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모든 백성은 아니며 자기 자신의 백성이라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은 절대로 헛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고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선택된 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속되는 자, 성령에 의해서 깨끗함을 입은 자--바꾸어 말한다면 선택, 구속, 거룩하게 되는 것은 동일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나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이나 요한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며, 바로 왕이나 가룟 유다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산양이지 양은 아니다. 우리들은 바로나 유다가 그리스도의 벗이며,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가르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류는 두 종류로 분류된다. 그리고 그 한편에 있어서는 명확하게 긍정되지만, 한편에 있어서는 암암리에 부정된다. 그리스도가 그 백성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균등하게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무질서한 전체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아니다. 그의 백성, 그의 신부, 그의 교회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농부는 자기의 밭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거기 나는 식물을 균등하게 --가라지도 밀도 --돌 본다고 생각할 자는 없을 것이다.
옛날의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과 우리들의 대 제사장인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비교가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전자는 후자, 즉, 그리스도의 모형이지만, 대 제사장은 속죄의 큰 날에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죄를 위해서 희생을 바쳤다.
제사장은 그들을 위해서 다만 그들을 위해서만 화해를 시키셨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들을 위해서만 기도를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백성에 대한 긍휼은 알미니안의 조건적 선택과 무제한적 속죄와의 교리에 있어서 보다도, 칼빈주의의 무조건적 선택과 제한적 속죄와의 교리에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의 결론에 있어서 칼빈주의 자는 일반 인류가 그리스도의 속죄에서 중대한 은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한마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아담의 죄 때문에, 전 인류에게 가해져야 할 형벌을 받지 않는 것, 또 그리스도의 속죄가 복음 선전의 근저가 되며, 많은 도덕적 감화를 세상에 가져오고, 많은 악한 감화를 억제하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태양을 악한 자에게도, 선한 자에게도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내려주신다. 많은 현세적 축복이 구원을 보증하는 데는 역부족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이와 같이 보증하는 것이다. 특정적인 구원, 혹은 제한적 속죄를 주장하는 자는, 인류 일반 드디어는 멸망될 자조차 그리스도의 이 죽음에서, 무엇인가 은혜 혹은, 이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들이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특수성격에 있어서 축복을 전 인류에게 가져왔다는 것, 즉, 그리스도가 용서와 화해를 전 인류에게 가져왔다는 것이다.
많은 축복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인류에게 넓게 흘러온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은혜는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시려고 할 때에 예견되는 것이다. 라고 컨닝 함이 말한 그대로이다.
그런고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